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이제 '우리 집'이 된 신혼집에서의 생활은 상상 이상으로 평화로웠다. 동쪽 집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은 황홀했다.
난생처음 일찍 일어나 남편을 위해 아침도 차려보고, 남편이 출근한 시간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책을 쌓아두고 읽었다.
그러다 기대앉은 소파에서 그대로 단잠에 빠지기도 했다. 혼자 때우는 끼니도 예쁘게 차려 먹었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오롯이 내 취향으로 꾸미고 채운 공간 속에서 누구도 내게 말 걸지 않았다.
'너는 이상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 고요가 주는 안정감은 정말이지 달콤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먼 타지에 살림을 차리게 됐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가서 외롭지 않겠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지만, 몰라서 하는 말.
그런 외로움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가족과 한 집에 살면서도 느꼈던 처절한 외로움에 비할까.
아직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 낯선 곳에서의 일상은 생각보다 더 자유로웠다.
결혼 전에는 사보 회사에 다녔는데 회사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 자체는 나와 잘 맞았다.
연구원부터 의사, 교수, 농부, 암환자, 자영업자 등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글로 풀어내는 취재기자로서의 일은 늘 긴장되면서도 새로웠고, 그래서 이 일만큼은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너무 멀리 떠나온 탓에 프리랜서로서의 삶이 이어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알음알음 일이 끊기지 않을 정도로 들어왔고, 그 기간만큼은 직장을 다닐 때보다 오히려 수입도 좋아져 결혼생활의 만족도는 더 높아졌다.
신혼 초, 남편의 일 특성상 2주에서 3주 정도 되는 긴 호흡의 출장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나도 업무를 위해 친정에 머물러야 하는 일이 왕왕 생기면서 회의 차, 취재 차, 친정에 꽤 자주 가게 됐다.
일단 결혼이라는 과정을 지나와서일까. 아니면 물리적으로 서로 부딪히는 시간이 줄어서일까.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 조금 더 조심스러워진 듯했다. 전과 같은 불편함 역시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떨어져서 지내다 보니 약간의 애틋함, 다시 만났을 때의 반가운 감정까지도 생겼더랬다. 하루에 꼭 몇 번씩 이어지는 남의 단점에 대한 수다도 그럭저럭 들어줄 만했다.
결혼 후 1년이 다 되어갈 무렵, 우리에게 아기가 찾아왔다. 사실 마음 같아선 2년 정도 신혼생활을 만끽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유쾌하고 좋으신 시부모님께 손주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이르게 준비를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시작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지금의 딸이 찾아와 주었다.
지금에 와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빨리 시댁의 구성원으로 편입되고 싶었던 것 같다. 은근히 손주를 기다리는 듯한 어른들의 지나가는 말씀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아이를 낳아야만 진짜 가족이 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 아무도 내게 뭐라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그런 부담을 가졌다.
시부모님은 거의 모든 대화에 농담이 섞여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유머러스하신데, 어머님의 이야기는 듣고만 있어도 너무 웃겨서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머니는 지난날 힘들었던 과거사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달변가였다.
아버님은 말수가 적은 편이시지만 다정했다.
남편의 누나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누나 밥그릇 위에 김을 올려주는 모습을 봤을 땐 나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해져 감정을 추스르느라 혼났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무심하면서도 따뜻한 행동을 본건 처음이라, 또 그걸 부럽게 바라보는 내가 혼자 가여워서 마음이 좀 힘들었다.
물론 시댁에 있는 게 내 집처럼 편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즐거웠다. 특히 온 가족이 밥상머리에 모여 술 한 잔씩 걸치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낯설면서도 좋았다.
게다가 손맛 좋은 어머님의 제철 나물이며, 수육, 오이지, 장아찌, 국까지 입맛에 너무 잘 맞아 전에 없던 집밥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도 이 가족의 진짜 일원이 되고 싶다.'
둘러앉은 식탁에 끼어 웃으면서도 그렇게 고아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임신 소식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지옥 같은 입덧이 시작됐다. 비스킷 한 조각도, 사탕 한쪽도 들어가는 대로 이자를 보태 쏟아져 나왔다. 엄마도 입덧이 그렇게 심했다던데, 이랬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새벽에는 엄마가 해준 불고기와 호박전, 참치 샐러드가 먹고 싶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임신하면 엄마 생각이 많이 난다더니 정말 그랬다.
'이렇게 우리의 관계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다독여가면서 나아지는 걸까'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힘든 입덧도 엄마의 고통을 함께 경험하게 된 것 같아 혼자서 한 뼘 더 가까워진 듯한 마음마저 들었다. 순진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