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아플 때, 엄마가 할 수 있는 일

by 김윤담

한 달 여의 시간이 흘러 오지 않을 것만 같던 수술 날이 다가왔다. 그때까지 나와 엄마는 서로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입원기간 동안 아이는 어머님께서 봐주기로 하셨고, 나는 남편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최대한 명랑하게, 아무 일 없는 듯, 병원 입원시간이 되기 전까지 우리는 대학로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찜해두었던 맛집에 줄 서서 점심도 먹고, 학림다방에 가 차도 한 잔 했다. 그리고 뚜벅뚜벅 병원으로 향했다.


뱃속에 물혹이 알게 된 이후부터 식사 후 소화가 좀 어려워졌고, 과식을 하면 윗배가 더부룩하고 불룩해지는 증상이 나타났지만 일상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겉보기엔 이렇게나 멀쩡한데 그렇게나 큰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입원 수속을 하고,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6인실 한쪽에 자리를 잡았다. 수술 전 이틀은 검사만 하면 됐기에 남편은 아이가 있는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 혼자 병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챙겨 온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꼬박꼬박 나오는 병원밥도 잘 챙겨 먹었다.


그리고 수술 전날에는 폐를 펴는데 필수적이라는 폐활량 연습도 열심히 했다. 알록달록한 세 개의 공이 들어있는 의료기구를 호스로 숨을 크게 들이마셔 공을 들어 올리는 거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기운이 넘쳐서 남편이랑 동영상까지 찍어가며 낄낄댔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이것도 다 추억이라며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려 인증샷까지 남겼더랬다.




입원하던 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수술 전날에 병원에 오겠다고.


제발 오지 말아달라고 했다. 굳이 또 내 인생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엄마로 인해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그런 나의 말에 또 빈정이 상한듯 했다.


정 오고 싶으면 수술 이후에 오라고 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다.


수술 전이 중요하지,
다 하고 나서 뭐하러 가니?


그리고 드디어 수술 당일, 수술용 레깅스를 챙겨 입고 누운 채로 침대에 실려 수술실로 이동했다. 누워서 바라본 병원 천장은 파노라마처럼 빠르게 스쳤다.


덜컹거리는 침대에서 링거대에 적힌 F 29세 여 글씨를 보며, '나 아직 20 대구나'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떨지 않기 위해 애썼다.


남편과 헤어질 때 울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했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는 자동문 앞에서 "나 손 한 번만 잡아주라"하고 씩 웃어 보인다는 게 왈칵,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감정을 추스를 새도 없이 침대는 수술실 안쪽으로 옮겨졌고, 수술 대기실에는 나 말고도 다른 수술 환자들이 연이어 들어왔다.

누운 채로 눈물도 닦지 못하고 훌쩍이는 나를 보고 옆에 계시던 아저씨가 물었다.


"무서워요?"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자꾸 눈물이 나요"


"암이에요? 나는 간암인데 이번이 세 번째 수술이에요"


"전 아직 몰라요. 혹을 떼내 봐야 알 수 있대요"


"아직 젊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돼요. 너무 겁먹지 말고, 수술 끝나면 많이 걷고, 잘 먹어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아저씨는 먼저 이동했고, 나도 그 뒤를 따라 수술실로 옮겨졌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수술실은 어찌나 춥던지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추웠다.


수술대에 누워 훌쩍이고 있는 동안 의료진은 차분하게 수술 준비를 이어나갔다. 양 손을 벌려 고정하고, 가슴 쪽에는 심전도 기기 같은 여러 선을 붙였다.

그리고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왜 이렇게 울어요. 무서워서?
예쁘게 해 줄게.
울지 마.
푹 자고 일어나요.

곧이어 마취가 시작됐고, 의사 선생님의 얼굴이 점점 흐릿해졌다.




누군가 칼로 내 뱃속을 휘젓는 느낌, 내 장기를 믹서에 넣고 몽땅 갈아놓은 느낌.


아주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겨우 눈이 떠졌다. 내 주변은 온통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수술이 끝나고 나서 막 깨어난 회복실 환자들의 아우성이었다.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는데 배가 너무 아파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내 발치에 있는 간호사에게 너무 아프다고 했더니. 무신경한 얼굴로 '원래 아파요.'라고 말했다.


순간 악마를 본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렇게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사람을 앞에 두고 저따위 표정과 말만 하다니.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겨우 눈알만 굴려 시계를 보니 원래 예정된 4시간을 넘어 8시간은 지나 있었다.


'뭐가 잘못된 건가?'


다시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간호사를 불렀다.

"저기요. 혹시 저 개복했나요?"


역시나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네"


'결국 배를 갈랐구나.'

흉터 따위를 걱정할 겨를도 없이 그냥 무작정 엄청난 통증이 밀려왔다.

내 의지로는 단 1cm도 움직일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난 그냥 송장처럼 누워 견뎌내야 했다.




나중에 정신이 들고나서 남편에게 들으니 수술 과정에 문제가 있어 시간이 훨씬 길어졌다고 했다.


알고 보니 간에 혹이 아니라 간과 가까이 있는 담관이 10cm 정도로 부풀어 있었던 것. 그래서 담관을 제거하고, 잘라낸 부위를 소장, 십이지장과 다시 연결했다고 했다. 결론적으론 간을 잘라내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수술이었고, 중간에 담도 전문의가 2명이나 더 투입될 만큼 복잡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개복을 할 수밖에 없었고.


떼어낸 조직에 악성종양이 있을 수도 있어서 최종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일주일에서 열흘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수술 이후에도 예상할 수 없는 답답한 날들이 아직 열흘이나 남아있었다.


수술이 끝난 후 장 마비를 막기 위해 걷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했다. 누운 자세에서 일어나는데 30분은 족히 걸렸다. 다시 땅을 딛고 일어서기까지 또 10여분.


내 몸뚱이 하나를 일으키는 일이 이렇게 큰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행위였다니. 이런 상황에 그저 화가 치밀었지만 그냥 묵묵히 링거대에 의지해 병동 복도를 뱅뱅 걷고 또 걸었다.



엄마는 수술이 끝나고 이틀 뒤인 주말에 병원에 왔다.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하늘색 구두를 신고, 곱게 화장을 하고, 양 손에는 짐을 가득 든 채였다. 병실에 들어온 엄마는 나는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짐부터 풀었다.


커다란 장바구니에서는 애플망고, 청포도, 풋사과 등 갖가지 과일이 나왔고, 다른 쇼핑백에는 간식거리인 빵이 가득 들어 있었다. (난 수술 이후 가스가 나올 때까지 금식이었고, 금식이 풀린 이후에도 한동안 흰 죽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자신도 암 수술을 받은 적 있던 엄마는 정말 몰랐을까.)


이건 다 씻어놓은거니까 그냥 먹어도 돼.
애플망고가 얼마나 비싸던지, 살까 말까 하다가
그냥 샀네.


이어서 "자네, 밥 먹었어? 잠깐 나가서 같이 밥 먹고 올까?"라고 말을 내뱉던 엄마는, 그때서야 내 생각이 난 듯 "아 참, 얘 혼자 못 있나?"라고 말했다.


차라리 두 눈을 감고 있는 게 편해, 질끈 감아버렸다. 잠깐 자리에 앉은 엄마는 내 팔목을 보고 "어머, 얘 손목 얇아진 것봐. 이참에 다이어트 제대로 되겠다."라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졌더랬다.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병동을 걷는 내 모습을 보곤, 자신의 수술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자신은 복강경 수술을 해 이제 흉터는 전혀 없다고 했다.

내 배에는 20cm에 가까운 흉터가 생겨버렸는데도 말이다.




출산하던 날의 악몽이 다시 되살아났다. 어째서 내 엄마라는 사람은 나의 고통 앞에서 이렇게도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말인가.


엄마는 정말 몰랐다. 그 순간 자기가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해줄 수 있는지.

그래서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행동과 말이 부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치레도 필요 없으니 그냥 제발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싶었다.




엄마가 가고 나서 며칠이 지났을까. 수술 후 회복기에 들어섰던 내 상태는 점점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원인불명의 고열과 오한, 구토 증상이 시작된 것이다. 정맥이 아닌 동맥에서 피를 채취하고, 온갖 검사가 이어졌다. 설상가상 혈압도 점점 낮아져 담당의사는 나를 중환자실로 이동시키라는 오더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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