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환자실에서 고아가 되었다

by 김윤담

중환자실은 다른 세상이었다. 내 침대가 자동문을 지나자 서너 명의 간호사가 나를 둘러싸 자리로 이끌었다.

옮겨 누운 뒤 곧이어 소변줄을 꽂았다. 다시 수술 직후처럼 화장실도 갈 수 없고, 내 마음대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중환자실의 소음은 나를 더 불안하게 했다. 너무 환한 조명, 불규칙적인 기계음, 간간이 들려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시선이 닿는 곳에는 기도에 호스를 꽂고 있는 할아버지가 있었고, 양 손이 천장 쪽으로 묶여있는 환자도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의료진들은 나와는 달리 매우 침착했다. 본인들끼리 농담을 하며 웃기도 하고, 내게는 보호자에게 가족사진을 부탁해서 가져오면 잘 보이는 곳에 붙여주겠다고도 했다.


'내가 여기 얼마나 있을 예정이길래, 사진을 붙여준다고 할까' 나는 더 불안해졌다.


아니에요. 저 금방 나갈 거잖아요.


고열에 따르는 오한 때문에 온몸을 떨면서도 난 그렇게 말했다.


내 상태가 좀처럼 좋아지지 않자 남편은 결국 육아휴직을 내고 내 간호에 매달렸다.


'괜찮다고, 나 혼자 있을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가 내 옆에 있어야만 그래도 좀 숨 쉴 것 같아서 이기적으로 그의 축축한 손을 잡고 미안함에 눈물만 흘렸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입원생활을 하면서 아침마다 피를 뽑고, 사흘에 한 번씩 링거자리를 바꾸는 데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중환자실은 예외였다.


이곳에서는 15분 단위로 혈압체크, 1시간 단위로 혈액검사가 이루어지는데 매번 주사를 찌르는 고통을 덜기 위해 정맥이 아닌 동맥에 바늘을 꽂아 연결하는 일명 A라인을 잡아야 했다.


아직 중환자실의 낯선 소리와 냄새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여자 의사가 다가와 5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굵은 바늘로 내 손목의 동맥을 찔렀다.

그 시술에 앞서서 본인도 내가 많이 고통스러울 거라는 걸 알기에 떨리는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래서인지 계속 성공하지 못했다.


마취를 하면 부어서 혈관 찾기가 더 힘들다며 서너 번이나 다시 시도했는데, 결국 실패했다. 바늘을 그냥 넣는 게 아니라 혈관을 따라 이리저리 쑤시는 느낌이라 도저히 맨 정신으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른 남자 의사가 왔다. 그녀가 실패하고 뒷 타임 의사에게 인계를 한 모양이었다. 그는 조그맣게 생긴 초음파 기계까지 가져와서 공을 들였지만 오른 손목과 왼 손목 그리고 오른발등과 왼발등의 동맥을 모두 쑤시고도 라인을 잡지 못했다.


결국 중환자실의 가장 선임이라는 교수가 나타났다. 이젠 제발 그만해달라고 울부짖는 내게 그녀는 "이거 제가 여기서 제일 잘해요. 제가 못하면 못하는 거예요."라며 호기롭게 주사를 들었지만, 결국 실패.


그리하여 나는 다시 1시간 단위로 동맥에서 그대로 피를 뽑아야 했다.


매 시간마다 나타나는 인턴은 나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보며 "많이 힘드시죠."라면서도 알코올 솜으로 손목을 닦고 여지없이 손목 정 가운데에 주사를 꽂아 넣었다.




그날 새벽 3시경, 잠시 선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추위가 또다시 나를 덮쳤다. 다시 열이 40도 가까이까지 오르고 오한이 시작된 거였다.


때마침 주변에 간호사는 없고, 누구를 소리 내어 부를 정도의 힘도 없는 상태라 그저 반 기절 상태로 누군가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얼마 뒤 한 간호사가 덜덜 떨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일단 열이 너무 높으니 양 겨드랑이에는 아이스팩을 끼우고, 이불 안으로는 따뜻한 바람이 나오는 호스를 넣어주었더랬다.


그 차가움과 따뜻함 사이 어딘가에서 난 기절하듯 잠시 잠에 들었고, 또 시간 맞춰 나타난 인턴에게 손목을 내어줬다.

그 날카로운 통증은 아직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잠시 정신이 들면 핸드폰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울었다. 힘이 없어 흐느끼지도 못하고 그저 한쪽으로 눈물을 흘려보내는 게 전부였다.


나는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까. 과연 내 몸이 나아지기는 하는 걸까.
이 지독한 추위에선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홀로 북극 어딘가 허허벌판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이튿날 나는 다시 일반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수술 이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혈액 속에 항생제 내성균이 자라 이상 고열 증세가 나타났다고 했다.

'VRE'라는 균이라고 했는데, 일반인들의 몸속에도 있는 장내 세균이지만 몸이 약한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어 나는 1인실로 격리됐다.


이후 내 병실에 들어오는 모든 의료진은 일회용 비닐 가운을 입고 라텍스 장갑을 낀 채로 나와 접촉했다.


복작거리는 6인실에 있다가 1인실로 오니 확실히 편하긴 했다. 그러나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은 병원 복도에서 나를 마주쳐도 은근히 피하는 게 느껴졌다.


서운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다만 어딘가로부터 동떨어져 나온 사람들의 감정을 이해하게 됐다고나 할까.


직접 접촉이 아니면 균을 옮길 가능성은 없다고 했지만, 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되도록 검사를 가는 일 외에는 거의 병실 안에서 머물렀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 문득 엄마에게서 연락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한 번씩 전화를 하라는 미션(?)을 주던 엄마였다.


'네가 자고 있을지 몰라서 전화를 못하겠으니, 네가 내게 전화를 하라'는 다소 황당한 제안에 나는 ‘숙제하듯 그러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했었다.


남편에게 엄마의 소식을 물으니 믿기 어려운 답이 돌아왔다.


'이제 너희와 연락을 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중환자실에서 바늘로 동맥을 찌르는 고통을 겪고 있을 때, 북극 얼음벌판에 홀로 놓여 있는 듯한 추위에 온몸을 떨고 있을 때, 남편은 중환자실 보호자 대기실에서 엄마의 신세한탄을 들어야만 했다고 했다.


그날 나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엄마는 뭘 느꼈던 걸까.

어쨌든 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을수도.



이해받고 싶은 엄마는 사위에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럼에도 딸년은 자신에게 얼마나 냉정 한 지에 대해 설명하고 또 설명했다고 했다.


그런 구구절절함으로 얻고 싶었던건 자신에 대한 동정이었을까. 아니면 지독하게 차가운 딸의 실체를 밝히는 일이었을까.




그때 알았다. 사람은 몸이 건강해야 그나마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는 걸.


몸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남편에게 전해 들은 그 말에 대한 분노는 고스란히 다시 신체적인 고통으로 돌아왔다.

내겐 스스로 마음을 다독일 여력이 모조리 소멸된 상태였다.


아, 드디어 나는 완전히 버림받았구나.
이제는 정말로 엄마를 미워해도 되겠다.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는데 그 시각 이후로 먹는 모든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마치 입덧할 때처럼 속이 메슥거려서 새콤한 사탕 하나만 입에 물어도, 신물이 올라와 몇 번이고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했다.


이 증상의 원인을 찾기 위해 또 엑스레이를 찍고, CT를 찍고, 피를 뽑았지만 역시나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제대로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었고, 머릿속은 엄마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복잡했다. 그리고 회진을 온 전공의에게 울면서 말했다.


저 몸이 아니고 마음이 아픈 거 같아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다음 날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님이 내 방으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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