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by 김윤담

내 병의 경우 기형적으로 부풀어 오른 담관을 떼어내는 것으로 치료는 종결, 다만 소장과 십이지장을 복잡하게 연결했기 때문에 수술부위에서 염증이 생길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 부분은 내가 조절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우선 3개월에 한 번씩 CT를 찍고 경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퇴원했다.


병원 지하에 있는 편의점에서 콩순이 인형을 사들고 집으로 향했다. 한 달 반 만에 만난 아이는 오랜만에 나타난 엄마가 낯선 건지, 미운 건지 한동안 곁에 다가오지 않았다.


병원에 있는 동안 체력도 너무 안 좋았고, 설상가상 폐에 물이 차 호흡에도 문제가 생겨 코에 산소 줄을 연결하고 지냈던 터라 아이와 영상통화도 하지 못했었다.

오히려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져 아이나 엄마 둘 다 힘들 거라는 시어머니의 조언도 있었고.


엄마는 미울지언정 손에 들려온 인형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는 콩순이의 옷을 벗겼다가 입혀주기도 하고, 물 먹이는 시늉도 하며 재밌어했다.


그래도 좋았다.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다가가 손이라도 만져볼 수 있어서.




우울증 진단을 받고 퇴원했지만 아이와 가족이 있는 일상으로 돌아오고 나니 마치 그런 일은 없었던 것 같았다.

남편은 수술 부위가 아직 불편해 복대를 차고 어기적거리며 걷는 내 모습이 꼭 티라노사우르스 같다며 놀렸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링거가 꽂혀 있지 않은 자유로운 두 팔, 씻고 싶을 땐 언제든 씻을 수 있고, 푹신한 내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편한 자세를 찾아 마음껏 뒤척일 수 있었고, 이제 더 이상 새벽에 간호사가 문을 불쑥 열고 들어와 체온과 혈압을 재는 일 따위도 없을 터였다. 지겨운 알코올 솜 냄새와도 안녕이었다.


수술 이후 만난 전공의에게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이 있었다.


퇴원하고 나면 12킬로그램 정도 되는 아이를 들어 올릴 수 있을까요?


집으로 온 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아이를 천천히 들어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전과 달리 안기 전에 몸에 바짝 긴장을 해야 했지만 그것조차 감사했다. 아이가 아직 이렇게 자그마한 것도, 그래서 이렇게 내 품에 쏙 품을 수 있는 것도 감사했다.


종교도 없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허공에 대고 속으로 감사인사를 올렸다.




엄마와는 연락을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먼저 하지 않는 이상 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좋았다.


한 달이 지나 퇴원할 때 병원에서 받아온 우울증 약이 떨어졌지만, 난 우울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많이 웃었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문득 설거지를 하거나, 한적한 길을 드라이브할 때면 과거가 선명하게 떠오르기는 했다.


열세 살의 나, 고등학생의 나, 스무 살 초반의 나, 스무 살 후반의 나.


어느새 서른 살이 넘은 나는 가끔 그때의 내가 못견디게 가여워져 스스로를 위로한다는 미명하에 뚝뚝 울기는 했다.


엄마를 미워해야만 하는 이유들이 너무 많아 그 사연들을 헤아리다가 불쑥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괜찮았다. 지금은 엄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다신 돌아가지 않을 거니까.


말랑하고 보드라운 나의 딸, 커다란 나무처럼 지친 내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착한 남편이 있으니 이젠 이들이 온전한 나의 가족이자 집이라고 생각했다.




석 달쯤 지나자 수술 부위가 얼추 아물어 허리도 꼿꼿이 펴고, 다시 예전처럼 움직이거나 가벼운 운동 정도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되었다.


퇴원 후 며칠 뒤에 다시 고열 증상이 나타나 사흘 정도 입원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 고비를 넘기고 나니 컨디션도 훨씬 좋아졌다.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고, 나는 집에서 종종 들어오는 프리랜서 일을 하면서 평온한 일상을 보냈다.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긴 출장을 다녀온 뒤 맞이한 첫 주말, 우리는 바닷가로 소풍을 가기로 했다. 남편이 출장 가 있는 동안 통 집에서만 지내던 아이를 데리고 모처럼 나들이 갈 생각에 설레던 나는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주먹밥과 유부초밥도 예쁘게 싸고, 피크닉 매트와 모래놀이 장난감도 챙겨뒀다.


아침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오프닝송처럼 산뜻한 오전이었다. 그런데 화장실에 간 남편이 30분이 지나도록 나오질 않았다. 원래 한번 들어가면 오래 있다가 나오는 게 그의 유일한 단점이라면 단점이라 잠자코 기다려야지 싶었으나, 5분 10분이 지날수록 부아가 치밀었다.


기대하던 소풍날 아침인데, 난 일찌감치 일어나 이렇게 수선을 떠는데, 자기 몸 하나만 씻고 나오면 되는 사람이 이렇게 화장실에 오래 처박혀 있다니.


생각의 생각은 꼬리를 물고, 태풍에 밀려오는 사나운 파도처럼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러니까 그냥 화가 났다기보다는 주체하기 힘든 감정이 나를 덮쳤다는 표현이 맞겠다.


처음이었다. 남편에게 그렇게 큰 소리로 화를 낸 건.


그가 원래 화장실에 들어가서 뭉그적거리는 게 습관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외에는 너무도 착하고 다정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밀려오는 감정에 완전히 지배되고 말았다.


남편은 황당해 보였다. 그러곤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혔다. 그 사이 나는 침대 이불속에 들어가 누워버렸다.


일어나서 나가자고 나를 부르는 남편에게 '기분이 나빠졌으니 가지 않겠다'라고 쏘아붙였다. 그때부터는 남편도 화가 난 듯했다. 더 이상 내게 말을 걸지도, 곁에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주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 다툼 아닌 다툼(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내긴 했지만) 이후로 일요일까지도 우리는 대화가 없었다. 남편과 나란히 누워있는 침대에서 어느새 쌕쌕 잠들어 버린 남편을 보며 서운함이 밀려왔다.


'더 이상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구나.'

'내가 왜 이러는지 묻지 않는구나. 너도 이젠 나한테 질렸구나. 이제 너도 곧 나를 버리겠구나'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아이 방으로 가 따끈한 아이의 살결을 쓰다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여기서 떨어지면 죽을 수 있을까


남편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고, 여기에서도 버림받으면 난 갈 곳이 없는데 그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토록 평온하다고 안전하다고 믿었던 우리 집도 한순간에 절벽 끄트머리 한 뼘의 공간처럼 위태롭게 느껴졌다.


'더 이상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도, 사랑받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도 지겹다. 이젠 그만 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생각의 전개였다.


하지만 불쑥 찾아온 자살충동은 나를 스마트폰 검색 창에 '7층 자살'이라는 단어를 검색하게 만들었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져야 깔끔하게 죽을 수 있을까. 이 층수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있을까.' 어두운 물음표를 단 손가락은 바삐 움직였다.


그 순간 그저 한 줌의 먼지가 되고 싶었다.

고작 이런 정도의 일을 가지고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래서 더 죽고 싶었다.


그러다가 다시 잠든 아이의 얼굴을 봤다. 내가 죽으면 이 아이는 자살한 여자의 딸이 되겠지. 평생 그 무게를 지고 사느라 나를 원망하게 되겠지. 내가 이 아이의 원망을 죽어서라도 감당할 수 있을까.


엄마를 미워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지독하게 힘든 일인지 내가 제일 잘 알면서.


난, 아직 괜찮아진 게 아니었다.

예쁜 밴드로 잠시 내 상처를 덮어두고 있었을 뿐, 아직도 과거에 발목 잡힌 채 현재를 불안해하며 버둥대고 있구나.

갑자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이대론 안돼,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어


다음 날,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에 차를 돌려 시내의 정신과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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