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의 고래가 되어 '엄마'라는 섬을 떠났다

by 김윤담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고 나서 바로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삶에 엄청난 의욕이 생겨나진 않았다. 하지만 의사의 말대로 옛 기억이 떠오르는 횟수와 강도가 줄어들었다는 건 체감할 수 있었다.


뭐랄까 기억을 확장시키려는 의지와 에너지가 약해졌달까. 어쨌든 내 일상은 한 알의 약으로 인해 조금 더 안정되기 시작했다.


지난 상담에서 정신과 약 복용에 대해 약간의 두려움을 내비치는 내게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에게나 힘들고 아픈 기억이 있지만
모두가 그러한 과거로 인해
죽음을 떠올리지는 않아요.

환자분은 약 복용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약의 도움을 받아 기억의 회로를 조금 조정할 수 있어요.

나를 힘들게 하는 기억으로 가는 길에
진입금지 표지판을 세워두고,
다른 길로 가게끔 유도해주는 거죠.


'진입금지 표지판', '기억의 회로를 조정해준다'는 말에 신뢰가 생겼다. 무작정 내 과거를 지우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당연히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다른 수많은 갈래의 기억으로 덮을 수 있게 도와준다니 조금 안심이 됐다.


그렇게 약효로 인해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는 괴로움은 줄어들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의사가 내게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다시 엄마의 존재를 떠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일주일이라는 시간 중 대부분을 내 몸과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업무를 하다 틈틈이 집안일도 했다. 옷장을 뒤집어엎고, 오랫동안 입지 않았던 옷을 과감히 내다 버렸다. 귀찮아서 미뤘던 바닥 물걸레질을 하고 나서 윤이나는 마룻바닥을 보고 있자니 뿌듯함이 밀려왔다.


우리 가족을 위해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차려내고, 아이와 함께 춤추며 노래를 부르고, 선선한 저녁에는 온 가족이 산책을 가기도 했다. 꽤 괜찮은 생활이었다.


엄마? 지금의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지 않아서였는지 문득 떠올리려 해 봐도 쉽지 않았다. 내게 화를 내며 전화를 끊던 목소리만이 흐릿하게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엄마는 벌써 실체 없이 둥둥 떠다니는 유령 같은 존재로 남은 것 같았다.


약 한 알이면 될 가벼운 과거였던가.

조금은 허탈했다.


그리고 상담을 가기 전 날, 아이를 뽀송하게 씻기고 난 뒤 침대에 나란히 누워 눈을 감았다.


그리고 꿈결처럼 아주 작게 수없이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바다 한가운데, 잔잔한 물결에 볼록한 등을 걸친 채 유영하고 있는 큰 고래를 발견했다.


나다.


그 모습이 떠오르자 직감적으로 저 커다란 고래가 곧 나라는 것을 직감했다. 시야가 더 넓어지면서 파노라마처럼 넓은 바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고래는 작은 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섬의 끝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 여자는 눈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손도 뒤로 묶은 채,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발악하고 있는 듯했다.


고래는 멀리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고래의 모습에서는 분노보다 약간의 서글픔이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을 멀리서 여자를 보고 있던 고래는 이내 몸을 돌려 반대편 더 넓은 바다를 향해 천천히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떠나는 고래를 보며 마음으로 응원했다.


더 멀리 가거라,
다시는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말거라.


섬 끄트머리에 서 있던 여자는 고래가 오는지,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메아리 없는 바다에 들리지도 않는 소리만 외칠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가련했지만, 누구도 위로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어느새 까맣던 밤하늘은 짙은 보랏빛으로 변해가고, 어스름한 새벽이 밝아왔다.


이 모든 장면이 아이 옆에 누워 생각에 잠겼던 그날 밤,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머릿속에 이미지로 떠올랐다. 상상 속 바다 풍경은 어두웠지만 평화로웠고, 심지어 동화책의 한 페이지처럼 아름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다음 날 다시 찾은 병원에서 의사에게 이렇게 전했다.


작은 섬 끄트머리에서
눈과 귀를 가린 채,
화가 잔뜩 나 있는 여자를 두고,
고래는 유유히 헤엄쳐
먼바다로 떠났노라고,

여자가 눈과 귀를 막고 있는 한
앞으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아마 그 고래 또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의사는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바삐 움직여 컴퓨터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그는 똑같은 약을 처방하며 이번엔 2주 뒤에 보자고 했다.


병원에서 나와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종묘사에 들러 토마토와 오이 고추, 파프리카 등의 모종을 종류별로 조금씩 샀다.

얼마 전부터 시작한 주말농장 텃밭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함이었다.


그날 저녁 일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긴 장화를 신고, 텃밭으로 갔다. 아이에게는 작은 호미 하나를 내어주고, 나는 모종을 심고, 쭈그려 앉아 주변으로 난 풀들을 뽑았다.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굳은 듯 보였던 땅은 호미로 푹푹 파내자 금세 푸슬푸슬해졌다.

호미로 잡초의 뿌리를 긁어내고 옆 도랑으로 휙 던졌다. 그렇게 풀 뽑는 일에만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잡념이 사라지고, 기분 좋은 피로감이 몰려왔다.


해가 저물어가는 5평짜리 작은 밭에는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고, 귓가에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는 기분 좋은 피로감을 느끼며 집 앞 편의점에 마주 보고 앉았다. 우리 부부는 시원한 맥주를, 아이는 달콤한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그리고 지금쯤 어딘가에서 유영하고 있을 고래를 아주 잠깐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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