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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에게 우아하게 대처하기

딸은 다 보고있다

by 김윤담

딸과 외출하려고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아래층 사람을 만났다.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쳤는데 그는 뒤에서 나를 불러 세웠다.


- 저기 사모님 발망치 소리 좀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낮시간이랑 저녁시간에 사모님 발망치 소리가 들리는 거 같아서.


두 번째 지적이다. 내 발망치 소리? 나라고 어떻게 확신하지?

작년이었나. 우리 집 타일 AS 날 기사님이 현관문을 열어놓고 작업한 적이 있는데 당시 소음 때문에 주의를 전하려 올라왔던 그는 그때도 비슷한 말을 했다.


- 평소 애기 발소리는 괜찮은데 사모님 발소리가 너무 들려요. 낮에도 밤에도. 그럼 그렇지. 실내화 쿠션 없는 거 신으시네. 저희는 4센티짜리 두꺼운 거 신고 다녀요. 밑에 층 시끄러울까 봐.


평소 소리에 예민한 편이라서 맨발로 걸어도 늘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걷는 편인데 내 발망치 소리가 심하다고? 실내화가 얇아서 그랬나. 너무 확신에 찬 그의 말투 때문에 당황하여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음표들은 뒤로한 채 우선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음료수와 간식을 챙겨 보냈더랬다.


이후 곧바로 층간소음방지 슬리퍼를 식구 수대로 구입해서 신고, 최대한 발 소리나 의자 끄는 소리 등이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지내왔다. 우리 식구 같은 위층을 만나고 싶다 생각할 만큼. 그 정도로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받고 싶지 않아 과하게 몸을 사리는 편이다. 우리 집에도 가끔씩 층간소음이 찾아온다. 발망치 소리, 공 튀기는 소리, 늦은 밤 물소리, 고성방가... 그 모든 소음이 다 우리 윗집이라고 장담할 수 없기에, 또한 간헐적이기에 우리도 감내하며 사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랫집 남자는 어떻게 그 소음 중 발망치 소리가 우리 집 식구 중 '나'라고 확신에 차 말하는 거지?

이번엔 유야무야 웃으며 죄송하다고 넘어갈 수 없었다. 더 이상 조심할 수 없을 만큼 조심하며 살고 있기에 당당했다. 그리고 아래층 아저씨와 엄마의 대화를 딸이 모두 보고, 듣고 있었다. 내겐 그 사실이 중요했다. 이미 너무 기특하게 아파트 생활에 적응하고 늘 실내화를 신고 사뿐히 걸어다니는 아이였다.


- 주로 언제쯤 발소리가 들리세요?

- 10시 넘어서 11시까지도 그렇더라고요. 대체 밤에 뭘 하시길래 이렇게 시끄럽지? 와이프랑 얘기하곤 했어요.

- 저희는 9시 반이면 취침모드라 아이는 자요. 어른들은 그 시간에 크게 움직일 일도 없고요. 저희 아닌 것 같네요.

- 아 근데 사모님 발망치 소리 같아서.


또 그랬다. 내 발망치 소리라고.

- 그 시간이라면 저희는 아니에요. 평소에도 조심하는 편이고요.

내가 한번 더 말하자 그는 '그럼 대각선 집인가 보다'라며 아님 말고 식으로 능글맞게 웃어 보였다.


- 층간소음이 꼭 윗집만 해당하는 건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며 돌아섰다. 이번에는 죄송하다고 하지 않았다. 우리 생활습관이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확신했고, 그 사람이 무례했기 때문이다. 아이와 볼일을 보고 돌아와서도 은근한 부아가 가라앉지 않았다.


더 똑 부러지게 말할걸. 이렇게 물어볼걸. 층간소음이 꼭 윗집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지. 귀댁 위층에 많은 세대가 살고 있는데 어째서 그 소리가 나라고 확신하는지. 내 생활습관과 일상패턴을 다 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건지. 후회가 밀려왔다.


- 아무래도 편지를 남겨야겠어.

퇴근 후 돌아온 남편에게 앞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하자 남편이 말했다.

- 뭐라고 쓰려고? 아니라고 했다며. 괜히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려고.

- 내 말을 제대로 알아먹는 눈치가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오해를 풀겠다는데 왜 해코지를 해?

우리 집에 세 식구 사는데 왜 나를 콕 집어서 내 발소리라고 하냐고. 자기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아? 그 말의 전제부터가 틀려먹은 거라고. 내가 위층에서 발망치 소리 들리면 윗집 아저씨 콕 집어서 아저 씨 발망치 주의해달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거 엄청난 실례 아니야? 그리고 그사람은 나를 정상으로 보겠어? 발소리에 명찰달고 사는 것도 아니고.


이 고리타분하고 둔한 남자. 이럴때 정말 멍청해보인다. 왜 시선이 무례한 말을 한 사람에게 가지 않고, 그로 인해 분한 사람에게로 향하는거야. 내가 왜 해코지를 당할거라고 생각하는거야. 그런데 왜 나는 해코지라는 단어에 심장이 덜컥 하는거야.


남편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딸이 묻는다.

- 해코지가 뭐야? 그 아저씨가 해코지를 왜 우리한테 해? 안 좋은 거지?

- 아저씨가 오해하고 있으니까 엄마가 편지 써서 알려줄 거야. 엄마는 그런 오해를 참을 수가 없어.

- 엄마는 참지 않지.

딸이 맞장구를 친다. 그리고 이어 묻는다.

- 혹시 내가 잘 때 침대에서 굴러다니다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를 아저씨가 들었나?


어린것은 어른들의 대화가 혹시 자신 때문은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다.

네 아빠는 40년 가까이 살면서도 읽지 못하는 그 미묘함을 어째서 너는 벌써 읽은 거니.

속이 상했다.


우연히 만난 윗집 여자에게 당신의 발소리를 듣고 있으니 주의해 달라는 말은 단순 층간소음 호소 이상의 무례한 발언임을 왜 내 남편은 모르는 걸까.

층간소음의 주체는 특정할 수 없고, 그 화살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아내에게 꽂혔는데도 바른말을 했다가 해코지당할 걱정을 하는 남자라니.

근 10년을 같이 살면서 이 사람에게 가장 실망한 순간이었다.


어쨌든 딸이 다 봤으니 더더욱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남편의 멍청한 대화를 다 들은 마당에 이 이상하고 찜찜한 상황을 당연하단 듯 넘어가서는 안 됐다. 우아한 반격에 나서기로 했다.


- 엄마가 이제부터 편지 쓸 거야.

- 화낼 거야?

- 화 안 낼 거야. 정확하게 필요한 말만 전달할 거야.



0000호 입주민님께


안녕하세요. 0000호 꼬맹이 엄마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지난 오후 아래층 입주민님께서 발망치 소음을 조심해 달라는 주의를 주셔서

저희 상황을 전하고자 몇 자 적어봅니다.

주로 낮시간과 저녁 10~11시경 발소리가 난다고 하셨고,

그 소리의 원인이 저 일거라고 짐작하고 계시더라고요.

오해를 풀고 싶습니다.

저희 집은 8시 30분부터 하루 일과를 정리하고 9시 30분이면 취침모드에 들어갑니다.

아이는 9시 30분이면 잠자리에 들고,

이후 어른들은 미디어 시청 등으로 각자 시간을 보내기에 저녁 시간에 집안에서 소란스레 이동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 집 또한 늦은 시간에 원인불명 기계음과 운동기구, 발망치, 물소리,

심지어 못 박는 소리와 욕설, 고성이 오가는 소리까지 들려오곤 합니다.

아파트 특성상 모든 소음이 어느 집이라고 특정하기 어렵고, 간헐적이기 때문에 일단은 감내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타일 AS 받는 과정에서 소음 때문에 아래층 입주민님께서 저희 집에 올라오셨을 때

실내화에 대한 지적을 주셔서 제가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피해를 드렸나 싶어

다음날 바로 쿠션화를 구입했고, 이후 저희 가족은 집에서 모두 4cm짜리 소음방지 슬리퍼를 신고 지냅니다.

당시에도 제 발망치 소리가 낮시간에도 심하다고 말씀 주셨는데

실은 저도 발망치 소리에 예민하기에 쿠션화를 신지 않더라도 늘 조심히 걷는 편입니다.

거주자님께서 들으시는 소리가 어떤 근거로 제 발소리라고 확신하시는지 당황스러웠는데요.

우선은 조언을 받아들여 층간소음에 더 유의하는 방식으로 노력해 왔답니다.

앞으로 저희 집에 예외적으로 가구 조립이나 타일 공사, 많은 인원의 손님 방문 등

소음이 예상되는 상황이 생기면 카페 게시글 등을 통해 미리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외의 상황에서는 늘 비슷한 패턴으로 조심스레 생활하고 있다는 거 알아주셨으면 해요.

아래 위층 이웃으로 만나 소음에 대해 의견 전하는 마음이 결코 편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저희도 참 어렵습니다.

벌써 몇 번 층간소음에 관한 언급을 해주셨고, 최대한 노력하고 있는 입장이라

오늘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도 '사모님의 발소리인 것 같다'는 말씀이 저로서는 무척 당황스럽고 난처했습니다.

저도 발망치 소리 싫어하고 그렇기에 낮밤 가리지 않고 더 조심하는 1인입니다.

단정하지 않아주셨으면 합니다.

오해를 바로잡고 싶어 저희 집의 대략적인 일상패턴과 층간소음에 대한 태도를 적어봅니다.

어렵게 꺼내신 말씀이라는 걸 알기에 저 또한 조심스럽네요.

하지만 저희 가족이 아래층 입주민분들께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는 걸 꼭 알아주셨으면 해요.

더운 날씨에 두 분 건강 유의하시고, 가정 내 두루 평안하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0000호 드림



떨리는 마음과 손으로 글을 적어 내려 간 뒤 딸에게 낭독해 줬다.


- 어떤 거 같아?

알쏭달쏭한 표정의 딸

- 괜찮아? 엄마 잘 쓴 거 같아?

슬며시 웃으며 끄덕였다.


- 그 아저씨가 한 말은 사실이 아니었고, 오해하고 있으니까 바로잡으려고 편지 쓴 거야. 그냥 넘어가면 안 되는 거야.


그러니 너도 누군가가 불합리한 오해를 할 때는 가만있지 말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입장을 밝혀야 한다는 둥, 아까 네 아빠의 발언은 무기력한 데다 비겁하기까지 했으니 그런 말이 멍청하다는 걸 꼭 알아둬야 한다는 둥 몇 마디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런 건 아이가 살면서 체득해 나가리라 믿으며 뒷말을 꾹 삼켰다.


우편함에 편지봉투를 꽂아두고 올라와서도 밤잠을 설쳤다.

과연 내가 적어 내려 간 문장들을 그 사람은 이해를 할까. 혹여 왜곡된 노여움에 휩싸여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르진 않을까. 다음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불편한 상상이 계속 떠올랐다.

편지를 써서 우편함에 넣는 행위 만으로 모든 감정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해야만 했다.

무지한지도 모른 체 무례한 그 사람에게 꼭 메시지를 전해야만 했다.

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고, 이런 내 모습이 딸에게 어떻게 비쳤을지는.. 훗날 들어봐야겠지.

부지불식간에 아랫층 남자와의 대화로 하루가 너무 피곤하다.


2025.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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