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피아노 연주가 날로 유려해지고 있다. 콩쿨대회가 다가오면서 집에서도 연습하는 시간이 늘었는데 검지로 '나비야'를 겨우 치던 꼬맹이는 어디로 갔나. 거실에서 빨래를 개며 경쾌한 피아노 리듬을 듣고 있으면 기분이 산뜻해진다.
한때는 나도 현란한 손놀림으로 피아노 건반위에서 놀던 때가 있었으나 지금은 오선지 위의 음표들이 무슨 음을 의미하는지 도통 가물가물하다. 손도, 박자감도 다 굳어버려서 한번은 아이 옆에 나란히 앉아 연주를 시도해보다가 꼬맹이가 찰싹 찰싹 손등을 하도 때려대서 씩씩대다 그만뒀다.
엄마라면 뭐든지 저보다 더 잘하는 줄 알던 녀석이 피아노 앞에서 쩔쩔매는 모습이 여간 통쾌한게 아니었나보다. 호랑이 선생님으로 변해서는 잔소리와 멸시를... 니네 피아노 선생님도 그러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근데 어째서 넌..
아이가 크면서 좋은 점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점점 더 듣기 좋아진다는 것. 집에 혼자 두고 잠깐 외출할 수 있는 자유가 생기는 것. 세 식구 식당에 가면 세 가지 메뉴를 맛볼 수 있다는 것. 책가방 챙겨줄 필요가 없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이가 크면서 고민도 늘어난다. 주로 나의 옹졸함에 대한 것이다.
아이가 제 할 일을 얼추 해내는 만큼 나의 자비도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할 수 있는데 왜 안해? 왜 칠칠맞게 행동해? 왜 더 잘하지 못해? 라는 질문들이 속에서 솟구쳐 오를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미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언제부턴가 그 이상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받아쓰기 시험에서 어이없는 실수로 하나 틀리면 속에서 나무라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홉개는 맞았는데도 그렇다. 틀린 것, 남들보다 뒤떨어지는 듯 보이는 것에 시선은 꽂힌다. 마음에서 차오르는 말을 차마 다 입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때때로 서늘해지는 내 눈빛을 아이가 읽지 못할리 없다.
그럴때마다 풀이 죽은 아이의 모습을 보면 뒤늦은 죄책감도 함께 따라온다.
두렵다. 아이가 더 큰다면 지금까지 잘 지내온 우리의 관계가 더 이상 화음이 아닌 불협화음으로 치닫는 것은 아닐까. 사춘기가 된 아이들은 정말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다던데. 오늘 내 서늘한 눈빛을 두고두고 기억해뒀다가 그때에 폭발시키는 건 아닐까.
그때가 되면 지금의 마음은 다 잊고 아이의 서늘한 눈빛을 괘씸해하겠지. 나또한 그런 엄마가 되겠지.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우리는 불협화음이 될까. 정말 그러고 싶지는 않은데... 매일 부족함을 느낀다.
2025.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