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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쿠쿠밥솥이 아니야

by 김윤담

내일이면 아이의 초등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난다.

가시지 않는 더위만큼이나 긴 시간이었다. 녀석이 제법 영글어 손 가는 일이 많이 줄었음에도 1학년 여름방학보다 시간은 더 더디게 흐른 듯하다.


찐득한 이 여름에 아이는 내게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을 갈구했다.

"엄마 나 봐봐, 엄마 안아줘, 엄마 이리 와, 엄마 사랑해, 엄마, 엄마..."

체력도 약하고 감정도 예민한 나에게 그저 엄마밖에 모르는 똥강아지 같은 아이의 발랄함은 과분하지만 버거웠다. 내가 좋아죽겠다는데 그래서 안기고 싶다는데, 자꾸만 부르고 싶다는데 힘들었다.

종일 사랑으로 가득 차 황홀한 엄마의 모습으로 살 수는 없었다.

자주 혼자 있고 싶었고, 고요함이 그리웠다. 동시에 그런 마음이 괴로웠다.

이런 내 마음을 어린것이 다 읽었나.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하는 걸까. 두려웠다.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없어 챗GPT에게 물었다.


-아이가 뽀뽀를 수시로 해달라고 하고, 끊임없이 안겨. 엄마를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좀 과한 건 아닐까 싶어. 지치기도 하고, 어떡하면 좋을까.


-9~10살 초등 저학년 후반에서 중학년 초입 이 시기는 많은 아이들에게 '애정 재확인기', '애정 폭발기'로 나타나는 시기야. 특히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일수록 그 애정이 강하게, 적극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해. (이하 생략)


애착이 불안정해서 반복적으로 관심을 얻으려 하는 걸까 걱정했는데 그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아이의 인생에서 아주 잠깐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언젠가 이 시기를, 이맘때의 글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되겠구나 싶어 잠시 감상에 젖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당장 내일로 다가온 개학 준비물을 챙기면서 내 목소리에는 단호함을 넘어 싸늘함마저 묻어나기 시작했다. 엄마의 냉소적인 분위기를 직감한 아이는 애써 어리광으로 무마하려 했지만 역효과였다. 필살기가 통하지 않자 아이는 결국 찔끔찔끔 눈물을 짜내었다.


"왜 울어?"

"엄마가 화내니까."

"화낸 게 아니라 네가 챙겨야 할 것들 알려주는 건데"

"그래도 표정이 무서우니까. 친절하지가 않잖아."

"엄마는 항상 친절해야 해?"

끄덕


아이는 굳건히 믿고 있었다. 엄마는 언제나 친절해야만 한다고. 그러니 조금만 단호한 모습을 보여도 아이는 엄마의 모습이 낯설었던 거다. 그건 녀석의 착각이다.


"엄마는 쿠쿠밥솥이 아니야."라고 말하자 아이의 눈빛에 물음표가 동동 떴다.

"쿠쿠밥솥은 언제나 친절하게 취사가 완료 됐다고 말하지?"

"응"

"당연해. 쟤는 사람이 아니라 기계니까."

"엄마도 그렇게 하면 되잖아."

"엄마는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야. 언제나 똑같은 강도로 친절할 수는 없어.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있고, 컨디션이 나쁠 때도 있어. 바빠서 정신없을 때도 있고, 엄마의 감정은 시시각각 달라져. 너한테 언제나 똑같이 대할 수는 없는 거야. 너도 엄마한테 툴툴거릴 때 있잖아."

슬며시 끄덕이는 녀석, 이해가 되는 듯 아닌 듯 알쏭한 표정이다.


"네 행동이 뭔가 아쉽거나 잘못됐을 때는 단호하게 알려줘야 하는 게 엄마의 역할이야. 그런 순간조차 친절하고 다정하게 말할 순 없어. 물론 엄마 표정이 차가울 때도 있겠지만 그 순간조차도 엄마가 널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 너도 엄마 밉다고 자주 말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날 사랑하잖아. 그렇지?"


끄덕

눈물을 훔치던 손으로 콧물을 쓱 닦는 모습이 또 귀엽긴 하다.

알아들었느냐는 눈빛을 은근하게 보낸 뒤 꼭 안아주었다.


글로 불과 한 시간 전 상황을 적고 나니 아름답네. 딸과 이렇게 대화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 오다니 기쁘다.

아주 오래전에 일상의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풀듯 감정을 폭발시켰던 내 엄마가 그때 해줬으면 좋았을 말들, 조금이라도 안심이 되었을 말들을 아이에게 건넨다.


아이에게 여전히 서운한 마음이 남아있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의 대화를 마음에 새겨두고 오래오래 기억해줬으면 싶다.


202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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