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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Jan 20. 2021

시어머니의 카톡을 읽고 뚝뚝 울었다

남편이 3주 동안 출장을 떠났다. 오늘은 이틀째 되는 날.

다행히 코로나 상황이 조금 나아지면서 아이는 다시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작해서 생각보다 덜 힘든 하루였다.


오래간만에 동네 맛있는 반찬 가게에서 밑반찬도 푸짐히 사다가 아이와 나 둘이 오손도손 저녁도 맛나게 해결했다.

다 먹어갈 무렵 시댁 단톡 방에 메시지가 떴다.


애기는 잘 놀았니?
어린이집 갔나?
아픈데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편하게.
엄빠 늙으면 해주고 싶어도 못해.


보통 먼저 연락하시는 일이 거의 없는데 얼마 전에 입원했던 탓에 내 몸 상태가 걱정되셨나 보다.

멀리 있기도 하고, 친정에 기댈 형편도 아니란 것을 알기에 연락하신 듯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 내겐 참 낯선 일이다.

지금의 남편과 연애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늘 한결같은 점이 있다면 내가 밥을 먹었는지 늘 궁금해한다는 것.


연애 초반에는 아침, 점심, 저녁마다 시간 맞춰 알람처럼 도착하는 메시지가 신기하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웠더랬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깨달았다.

그게 사랑이라는 걸.


아침은 거르기 일쑤, 점심 한 끼 정도 제대로 먹고, 저녁은 다이어트 핑계로 거르는 날이 많았던 나였는데, 결혼 후 많이 달라졌다.


시댁 어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보통 7시 반 정도면 밥을 먹는데, 별 것 아닌 반찬에 따뜻한 밥, 국 먹는 게 어쩜 그리 맛있던지. 오전 7시 반, 12시, 저녁 6시에 챙겨 먹는 삼시 세 끼, 소박해 보이는 집 반찬이 정말 특별한 것이라는 것도 결혼 후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도 시댁에 가면 눈을 반짝이며 호박볶음, 오이지, 가지무침, 연근조림 등의 반찬을 집어먹곤 한다.




아이 밥을 다 먹이고 영상통화를 걸겠다는 답장을 보내고 난 뒤 밥을 마저 먹고 상을 치우는데 메시지가 또 왔다. 보자마자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어 미처 닦을 새도 없이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영통 안 해도 돼. 그냥 니가 걱정이야.
**이는 엄마 있잖어. 할미가 뭔소용.
니가 걱정. 마니먹고 애기 잘봐.
나는 니걱정. **는 니걱정.ㅋ
씩씩하자.


이럴 때 나는 속수무책이다. 엄청난 문장도, 글귀도 아닌데 숨이 가빠지도록 차오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어 싱크대 수전 앞에 서서 그야말로 뚝뚝 울었다.




아프기 전까지 난 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고 생각했다. 내 몸과 정신이 건강하면 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고.


그렇게 자만했다. 마치 나는 평생 그렇게 꼿꼿할 수 있을 것처럼.


지금까지 부모와 형제 모두 다 날 걱정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아빠가 중학생이었던 나와 동생, 엄마를 두고 ‘독한 년’이라는 한 마디를 남긴 채 집을 나갔을까. 엄마가 나를 걱정했다면 아이를 낳기 위해 24시간 넘게 진통하는 딸을 보며 ‘신선놀음한다’는 말이 나올 수 있었을까.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면, 중환자실에 있던 내게 인연을 끊어도 좋다고 말했을까.


나 역시 그들에게 걱정을 바라지 않았다. 그게 너무도 당연한 내 삶의 디폴트 값이었다.


나의 남편,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는.




처음 결혼 후 시댁의 존재는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게도 약간은 불편하고 무거운 존재로 느껴졌었다. 신혼 시절 손주 보고 싶은 마음을 짓궂은 농담으로 던지는 말씀에도 퐁알퐁알 말대답으로 응수하며 나름 발칙한 며느리 캐릭터를 선보이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 손주가 보고 싶다며 당일 아침에 연락하고 집으로 찾아온 시부모님께 이러시면 안 된다, 농담 반 진담 반 벌금을 내시라고 말했던 것도 나였다. 그때 아버님은 머쓱해하며 진짜 5만 원짜리 넉 장을 쥐어주셨다. 그리고 다신 그런 방식으로 방문하지 않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했나 싶지만.


아마 내 몸이 아프지 않았다면 적당히 눈치 보고, 적당히 개기면서(?) 싹싹하면서도 다소 살벌한 며느리 캐릭터를 이어나가지 않았을까.


모든 상황이 반전된 건 역시 갑작스러운 내 수술이었다. 간에서 발견된 10cm짜리 혹, 암 일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그 존재의 등장은 내 삶을 마치 기원 전과 기원 후처럼 극명하게 갈라놓았다.


그때 나는 그냥 혼자만의 내가 아니었다. 아직 말도 못 하는 17개월짜리 딸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내가 아프면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 당장의 내 병보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나와 같은 병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카페의 여러 후기를 찾아보며 '수술 이후 간병인 없이 혼자서 병원생활을 할 수 있는지',  '회복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얼마나 지나면 10킬로 정도 되는 아이를 들어 올릴 수 있는지'를 가늠했다.


당시 아이는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으니 간병인 없이 생활이 가능하다면 남편이 아이를 등 하원 시키면서 입원기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때 친정엄마와 나의 관계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상태였지만 당연히 엄마도, 나도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간에 10cm짜리 혹이 나왔다고 했을 때도 엄마는 그까짓 것 떼어내면 그만이라고 했었다. 괜찮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그 말이 왜 나는 괜찮아야만 한다는 뜻으로 들렸을까.


물론 부탁할 생각도 없었지만, "나 수술하면 간병해줄 거야?"라는 나의 헛된 물음에 엄마는 "내가 미쳤냐. 나 일해야지."라고 답하는 엄마에게 아이 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며느리 입장에서 시댁에 아이를 맡기는 일은 그리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친정이 버젓이 있는데도 아이를 봐달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며칠 밤을 설쳤다.




수술 날짜가 잡히고 시댁에 갔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아이를 봐주시겠다고 했다. 아버님은 내 수술비를 대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실비보험이 없어 수술비도 막막하던 차였다. (여담이지만 아가씨 시절, 실비를 들까 말까 고민하는 나에게 엄마가 너 같은 건강체질은 보험 안 드는 게 득이라면서 만류했다. 큰 수술을 받고 보니 그때 들지 않은 게 천추의 한처럼 여겨졌더랬다.)


고개도 채 들지 못하고 감사하다고 말하는 나에게 어머님은 단호히 말씀하셨다.


당연한 거야. 가족이니까.
고맙다는 말도 할 필요 없어.


다정한 말투도 아니었지만, 얼어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가족이니까'라는 이 말이 그렇게 따스한 온기를 가지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그간 내게 ‘가족’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처럼 느껴졌기에.




수술 후 2주 정도 입원을 예상했지만, 회복 과정에서 계속 문제가 생겨 한 달 이상으로 입원 기간이 늘어났다. 그간 내 몸은 간병인 없이 생활은 커녕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할 만큼 쇠해져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퇴원을 앞둔 어느 날, 뭐가 먹고 싶으냐는 어머님의 물음에 철도 없이 날름 꽃게탕이라고 대답했더랬다.


그다음 날엔가 어머님한테서 카톡이 왔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네.
꽃게탕 끓여줄게.
아빠가 당진에서 사왔네.
살아있는거로.

그러고 보니 어머님 카톡을 받고 운 게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네. 퇴원 후 시댁에 가서 먹은 그 꽃게탕 맛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설탕을 넣은 것 마냥 달달하고 시원했던 그 국물 맛.




올 초 입원했을 때 급히 아이를 맡기고 나서 일주일 뒤 데려오는 길에는 이런 메시지도 보내셨더랬다.


엄빠있으니까 자신있게 잘 살어.
살다보면 힘든일도 많어.
그럴때 생각해. 가족. ㅎ
나도 가족 맞지?


돌이켜보니 이날도 눈물이 핑 돌아 눈물을 훔쳤구나.


어머님은 평소 말씀을 다정하게 하시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끔 무심히 감동을 주신다. 아마도 내가 친정과 연을 끊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더 마음을 쓰시는 것 같아 자주 울컥하게 된다.




회사에서 별명이 '잔다르크'였을 만큼 클라이언트나 상사에게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할 말 다 했던 나였건만, 뒤늦게 맛보는 부모님의 사랑 앞에서 자꾸만 고개를 숙이게 된다.

이제 혼자 꼿꼿이 서 있기보다는 시부모님께 자꾸 기대고, 안겨 울고싶어진다. 물론 실제론 그러지 못하고 이렇게 숨어서 울고, 글로 마음을 담는다.


앞으로 더 잘해드려야지.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다짐한다.


내가 몸이 아파 병상생활을 해보니 누구보다 환자가 가장 힘들고 외롭다. 옆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나보다 더 중한 병을 앓고 있는 것도 당장에 중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폐인 꼴로 누워있는 나의 소변까지 묵묵히 받아내던 남편, 막막한 순간에 아이와 나를 돌봐줬던 시부모님에 대한 감사함은 평생에 걸쳐 갚아야 할 감사한 빚이다.




오늘 저녁 어머님의 갑작스러운 메시지에 눈물을 왈칵 쏟으며 쓰는 글이라 다소 두서없을 수도 있겠다.


이 뜨거운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브런치에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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