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멀리 있는 마음이지만
열이 오르면, 10분 전의 행복도 촛불처럼 사그라든다.
지난 연말에 이어 일주일 전에도 고열로 병원 신세를 졌다.
아주 약간의 긴장과 스트레스에도 이렇듯 격렬하게 반응하는 내 몸
이번에도 빨간색 바탕에 39.9라는 숫자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경련하듯 떨리는 몸으로 응급실에 입성해 곧바로 항생제를 투여받았다.
또 시작이구나. 적어도 일주일은 입원해야겠구나.
벌써 몇 번째 반복되는 일임에도 오한과 함께 찾아오는 기분 나쁜 구역감은 좀체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녀석도 함께 찾아왔다. '우울감'
열이 슬슬 오르기 시작하던 그날 저녁, 내 일상에 우울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처럼 놀러 오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이곳저곳 놀러 다니며 맛난 것을 대접할 생각에 설렜다.
물론 아침 식사는 어떻게 차려야 할까. 맛있게 드셔주실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몸이 무너질 정도의
스트레스는 아니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식물원도 가고, 케이블카도 태워드리고, 전망 좋은 카페에서 수다도 떨었다.
문제는 저녁이었다. 슬슬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안돼. 이 좋은 순간에 왜'
급히 타이레놀을 사러 식당 근처 편의점에 갔지만 팔지 않는다고 하여 오로지 정신으로 내일 아침까지만
버텨보자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아픈 것 없이 건강하게 잘 사는 줄 믿고 계시는(물론 열이 오르지 않을 때는 전혀 문제없이 건강. 다만, 열이 언제 오를지 모른다는 게 문제) 시부모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숨긴다고 숨겼는데도 내 모습이 피로해 보였는지 어머님 아버님은 눈치를 채신 듯했다.
그래도 집에 가실 때 까지는 제대로 모시자는 생각으로 밤새 오한을 견뎌냈다. 타이레놀 네 알의 힘으로 아침까지 차려낼 수 있었다.
남편은 지금 밥이 대수냐고 했지만, 1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시부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내 안색을 보고 눈치채셨는지 두 분은 아침 일찍 훌쩍 집을 나서셨다.
그리곤 어머님 아버님이 현관문을 나서자마자 거짓말처럼 나는 쓰러지듯 누워 온 몸을 벌벌 떨었다.
골이 딩딩 울리는 두통과 구역, 고열을 동반한 오한은 일순간에 나를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항생제 링거를 연달아 맞아도 3일 차 까지 큰 호전이 없었다.
병실 변기통에 빈속을 게워 내고 나서 바라본 거울 속에는 잿빛이 된 내가 들어있었다.
이게 내 진짜 얼굴인 걸까.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할 운명인 걸까.
사랑스러운 딸과 다정한 남편, 든든한 시부모님은 모두 꿈이 아니었을까.
세상에 내 까짓 병, 항생제로 잡히는 열 따위가 우습게 지독한 병과 싸우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래도 나도 불행했다.
그 고통을 느끼는 건 오직 나뿐이니까. 그러니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싶다가도.
또 걷잡을 수 없는 기운이 내 전신을 꽁꽁 싸맸다.
가만히 누워있어도 눈물이 났다.
그냥 흐르는 게 아니라 꺼이꺼이 울음이 났다.
곧 나을 건데 왜 이럴까 하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청소하시는 분이 들어왔는데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었다.
열이 어느 정도 잡혀 퇴원할 시기가 되었는데도 이상하리만큼 구토 증상과 두통이 낫질 알았다.
진통제도 소용없었다.
가시지 않는 두통과 구역질
나의 엄마도 그랬다.
예민했던 엄마는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두통을 호소하며 화장실로 달려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등을 두드려주는 건 나의 몫이었다.
나중에는 감흥도 없이 또 시작이구나 싶었더랬다.
나한테 이런 걸 물려줬구나.
이런 걸 닮았구나. 엄마의
힘들었겠다. 많이 아프고 외로웠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 엄마는 남편도 든든한 친정도 시댁도 없었는데
애 둘만 혹처럼 달려있었는데
뒤집힌 속을 그렇게 게워냈구나.
이렇게 먼발치서 엄마의 고통을 함께 겪으며, 이해하게 될 때
괴롭다.
늘 끝엔 물음표가 남는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랬어?
서로 토닥이면 좋았을 텐데.
이런 마음이 들 때 슬프고 억울하다.
홀로 퇴원을 하고 집에 와 씻고 들깨 순두부찌개를 시켜 한술 뜨곤 또 다 토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거실을 휘휘 걸어도 보고, 명상과 관련된 영상을 틀곤 가부좌를 틀어 명상을 해봐도 소용이 없었다.
하원하고 온 아이에게 아이스크림과 아이패드를 맘껏 하도록 내어두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만 있었다.
영원할 것 같은 이 두통,
퇴근시간이 되자 남편이 왔다.
나 좀 안아줘. 자꾸만 눈물이 나.
마음의 감기가 왔구나. 하며 꼭 안아주는 착한 사람.
약물치료가 끝났는데도 호전되지 않는
내 신체 증상이 몸이 아닌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
식탁에서 남편이 아이에게 밥 먹이는 모습을 보며
소파에 앉아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어보았다.
우리의 집, 저토록 사랑스러운 우리, 우리, 우리
내가 슬플 이유가 없다.
내가 슬플 이유가 없다.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어 져 배달을 시켰으나 두어 젓가락 뜨고 만 내가 이번엔 수박이 먹고 싶다고 하자
그는 군말 없이 나가 실한 수박을 한 통 사 왔다.
어찌나 시원하고 달던지.
10분 전의 두통이 10년 전 일인 듯 아득하게 괜찮아졌다.
한동안은 이 수박의 힘으로 살아낼 것이다.
또 오랜만에 글을 올리네요.
자주 글을 올리지 않아도
라이킷 해주시고, 마음 담아 댓글 달아주시는 내용
잘 읽고 있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모두들 몸과 마음 건강하시길요.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