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에 애는 무슨
이 한 몸 건사하기에도 벅찬 세상이다.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으로 모두가 집에서 지내야 했던 시절, 벌써 고리짝 이야기 같지만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우린 집 밖에 나가는 일상을 통제당해야 했다. 아이들은 얼굴을 반쯤 가리는 매일이 당연했고, 친구와 마주 보며 밥 먹는 것, 살 비비며 노는 것마저 스스로 꺼리는 법을 배워야 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던 자리, 누군가 만졌던 물건, 누군가의 기침소리에도 불안을 느껴야 했던 시절, 내 아이는 바깥에서도 잠시나마 마스크를 벗기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엉엉 울었다.
역병만 문제일까. 치솟는 물가 속에서 아등바등 살면서도 분수를 모른 채 치솟는 사교육열, 인스타그램 속 예쁜 아이 옷, 철철이 떠나는 여행사진을 보면서 꿋꿋하게 아이를 키워내기란 여간 버거운 일이 아닐 테다.
그뿐인가. 누구나 알아볼만한 브랜드 옷을 입히고, 야자수가 우거진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주말마다 캠핑을 하고, 연령에 맞는 전집으로 책장을 가득 채우고, 유기농 식재료로 밥을 해 먹이고, 엄마들 모임에 들고나갈 명품백도 종류별로 구비해 두고.. 등등등 밤톨만 한 아이에게 좋은 것으로 해줄라치면 끝도 없는 게 육아의 세계다. 디올, 구찌 등 럭셔리 브랜드에서 배냇저고리도 나오는 세상 아닌가 말이다.
아직 싱글인 내 친구는 임신이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다지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 나도 100%, 1000% 동감한다. 요즘 세상에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한다면 그보다 큰 재앙은 없을 거다.
하지만 나의 선택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있는 지금, 나에게 육아는 '럭셔리'다.
"자식 낳지 마세요" 재수생 부모 한탄에..
다음 생엔 딩크족으로....
얼마 전에 이런 제목의 신문기사를 읽고 마음이 뒤숭숭했던 적이 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둔 내가
착하지도, 성실하지도, 부모에 대한 아량도 없는 재수생 자녀를 키워본 적도 없는 내가 기사 제목에 언급된 부모들에게 보탤 말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나 같은 부모 자식 간의 여러 갈래 중에 저런 길도 있구나 싶어 나만의 생각으로 정리를 해보려 한다.
세상에 모든 아이는, 심지어 지금의 어른들도 부모로 인해 일방적으로 세상에 소환되어 영문도 모른 채 생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인 것을 생각하면, 적어도 부모의 입에서 저런 류의 말 만은 끝내 삼켰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 양육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희생이 뒤따르기에 임신과 출산은 철저히 선택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선택의 경계에서 남편과 나를 똑 닮은 아이 하나 키우는 일을 대단히 보람차고, 기꺼이 감내할 사명으로 받아들이며 지내고 있다. 더구나 갈수록 각박해질 것이 뻔한 이 세상에서 말이다.
그러니 신문 기사를 읽고 마음이 뒤숭숭했던 거다.
각자 몸뚱이 하나 먹여 살리기도 힘들고 바쁜 세상이란 걸 누구나 다 알고 있건만,
남이사 아이를 낳든 말든 무슨 상관이기에
공개된 자리에 저리도 독한 말을 뱉었을까 싶은 거다.
저 기사 밑에 아이를 낳으면 유년기나 예쁘지, 청소년기에는 학원비에 뭐에 돈 들어갈 곳이 많아 등골이 휜다는 둥 구구절절 써 내려간 기사 내용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으로 키운 부모 밑에서 아이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싶다.
그 누구의 강요도 아닌 스스로 행동의 결과로 얻어진 자녀의 존재를 고작 짐짝 정도에 비유한다면 남은 생은 얼마나 고단할까. 봇짐 진 당나귀 꼴 모양으로 인생을 사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나는 이왕 아이를 낳은 김에 육아를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 아이의 존재는 내 삶 최고의 '럭셔리'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물질이 아닌 내가 부모로부터 받지 못했던, 그토록 원했던 사랑을 아이에게 쏟아붓는데 집중하기로 했다.
완벽한 부모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아이를 키우는 일이 더 나은 인간으로의 수행임을 알고 이 길을 걸어갈 거다.
이 미친 세상에 아이를 낳아 키우는 일은
더 미친 일이다.
이제 육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기꺼이 선택하고, 선택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기에 내가 육아를 보는 관점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만으로 '럭셔리' 그 자체이다.
경제적인 관점을 벗어나서 인간에 대한 애정, 연민, 희생, 책임감 그리고 나보다 진화한 존재의 신비 등등 그 모든 것들을 이런 시대에도 기꺼이 경험하고 해내는, 그런 모습이 정말로 멋지지 않은지. 철학 없이는 결코 하기 힘든 일이기에 임신과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이 프로세스를 나는 단절이 아닌 굉장한 스펙으로 여기고 있다. 동시대에 아이를 낳아 정성으로 키우는 부모들을 보는 나의 시선도 물론 그러하다.
(물론 아동학대를 일삼는 인간 이하의 부모들은 당연히 제외하고서 말이다. )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는 더더욱 그럴 거다.
딸의 유년시절 토실한 귀여움이 사라진다 해도..
아이는 귀여워하려고 낳는 게 아니니까.
사랑하려고 낳는 거니까.
나를 다시 키워보는 경험은 어떤 금전으로도 살 수 없는 거니까.
앞으로도 이토록 말캉하고 보드라운 아이가 내 눈앞에 있음에, 안을 수 있음에, 대화하고, 눈 맞출 수 있음에,
이 유일한 존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할 테다.
이 각박한 세상에 나와 DNA를 나눈 작은 아이만큼 무해한 존재가 또 있을까. 이 존재를 내 시간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와 맞바꿀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럴 수 있겠지만 나는 기꺼이 이쪽 길을 선택했다. 대단한 보람이다.
물질적인 초점으로 육아를 바라본다면 아이 키우는 일은 엄두도 나지 않을 두려움이 맞을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아이의 양육목표를 물질이 아닌 정서를 채우는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더 멋진 곳에 가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갖기보다 부모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통통한 마음을 지닌 아이로 키우는 것이 나의 간절한 목표이다.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통통한 마음'이 인생의 가장 럭셔리한 가치임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진심으로 키운 아이가 훗날 나를 업신여길 수 있을까.
나의 양육시간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까.
당연하게 여긴다 한들 내가 아이에게 무얼 요구할 수 있을까.
이 아이를 세상에 불러내 이미 평생의 행복을 선불로 지불받은 것을.
나의 딸이 스무 살이 넘어서 이 글을 읽게 되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후회 없이
아이와 함께하는 럭셔리를 충분히 누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