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히 잠든 아이를 끌어안아본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인생 최대의 사치이자 최소 60년짜리 할부를 지는 일과 같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너무한 걸까.
낳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이렇게나 온 마음을 들여야 하는 일인 줄. 그리고 나 자신의 민낯이 완전히 드러나는 일인 줄.
뜨끈하고 말랑한 것이 내 안에서 울컥 쏟아져 나왔을 때, 젖을 찾으려 필사적으로 뻐끔거리는 작은 입을 봤을 때 철없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용을 쓰고, 드디어 제 몸을 뒤집을 힘이 생겨 뒤집기를 성공했을 때, 낮은 포복자세로 놀잇감을 향해 맹렬하게 기어가기 시작했을 때, 모닝빵처럼 통 실한 발로 처음 땅을 디뎌 한 걸음을 떼었을 때도 아이는 내게 기쁨만을 가져다주기 위해 재림한 존재 같았다.
아이의 돌이 지나고 갑작스레 받게 된 큰 수술과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의 병원생활,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본격적으로 내 엄마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부터 육아에 대한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딸이 생사를 오가는 고통 앞에서도
너무나 의연했던,
내겐 한 번도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던 '엄마'.
나는 그러지 않으리라
나는 내 아이를 위해 기꺼이 죄인이 되리라.
불완전하고 미숙한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 자체가 너무 내 만족을 위한 일 같아 역시 부모가 되는 건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상기시키는 일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더구나 매년 심해지는 미세먼지에 취업난 하다못해 이젠 전염병까지 창궐하는 이 세상에 굳이 또 하나의 존재를 세상에 내보냈어야만 했나 하는 의식의 흐름은 늘 나를 '죄인'으로 만들곤 했다.
긴 입원생활을 마치고 퇴원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알량한 장난감으로 아이의 환심을 사보려 병원 지하 편의점에서 콩순이 인형을 샀다.
입원해있는 동안 줄곧 산소 줄을 달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또 아이 모습을 보면 눈물부터 흘릴까 봐 영상통화도 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더랬다.
아이는 어떤 표정으로 나를 맞아줄까. 설레는 마음으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섰는데 엄마를 알아보는 건지 아닌 건지
아이의 눈빛은 텅 비어있었다.
아가, 엄마!
애써 웃으며 팔을 벌려보아도, 그저 놀던 장난감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환심을 사기 위해 준비한 인형에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17개월 이 꼬맹이가 엄마를 기다리다가, 그 조그만 가슴이 상해버렸구나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번쩍 들어 올려 안아보고 싶었지만, 개복수술로 인해 아직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신세라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뚱한 그 눈빛이 너무 아려서 차마 가까이 가 앉지도 못하고, 그저 한참을 아이가 노는 모습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아빠 품에 있던 아이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나서야 내 주변을 살금살금 맴돌기 시작하더니 폭 안겼다.
신생아 때부터 유난히 순하던 아이. 워낙 잘 먹고, 새벽 통잠도 잘 자는 데다 잔병치레도 없어 주변에서 너는 애 공짜로 키운다는 소리를 들어도 딱히 반박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고마운 딸.
그런 아이의 17개월 인생에 엄마의 자리가 한 달이나 비워뒀다니. 사실 병원에서는 아픈 내 처지에 매몰돼서 아직 어리니 잘 지내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는데 어느새 여물은 아이의 눈빛에 나는 영 마음이 쓰였다.
퇴원 후 일상은 차츰차츰 돌아왔다. 내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남편에게 전했다던 '연락하기 싫으면 연락하지 말라'는 엄마의 말이 설마 진심은 아닐 것을 알면서도, 내가 버림받을 기회를 주었음에 감사했다.
정신과를 다니면서 엄마에 대한 생각과 미움을 저만치 떠밀려 보낼 수 있었고, 몸도 회복되면서 그럭저럭 괜찮은 일상이 이어지는 듯했다.
그 사이 아이는 자라나 말문이 터지고 어느 정도 소통이 되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듣지 못했던 아이의 속마음을 듣게 될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엄마는 날 안 사랑하는 것 같은데,
엄마 미워,
엄마는 맨날 거짓말 치잖아.
어쩌다 한 번씩 툭툭 튀어나오는 아이의 말에 내 마음은 움푹움푹 파였다. 이제 네 살배기 꼬맹이가 순간 서운함에 내뱉는 말일 테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자식의 한마디 한마디에 휘청이는 한편으론 여린 존재라는 걸 새삼 깨닫고 말았다.
때론 이런 생각들이 '지난날의 나는 엄마에게 어떤 모습을 한 딸이었을까'를 떠올리게 만드는 것도 너무나 힘들다.
내 엄마라는 존재와 완전한 단절을 그토록 염원했지만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것은 동시에 내 엄마와 나의 관계를 확인하고 내가 그 입장이 되어보는 일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오늘 저녁잠을 자지 않는 아이에게 매정한 말투로 화를 내놓고, 또 미안한 마음에 아이 어릴 적 사진을 뒤적였다. 이내 아이방으로 가 말랑한 볼과 보들한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공연히 잘 자는 아이를 끌어안아본다.
그래도 나는 너에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가 될 거야.
이렇게 부족하지만
그래도 좀 봐달라고
너를 꼭 먼저 안아줄 거야.
그러면 너는 언제든
나를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