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담 Dec 01. 2020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 줄 아느냐”고 묻지 않기

엄마 말의 오류

목욕 후 아직 엷은 물기가 남아있는 아이의 뽀송한 냄새를 맡으며 머리칼을 쓸어주다 묻는다.


넌 어디에서 왔어? 기억나?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찾아온 거야?


그러면 아이는 엄마의 이런 질문이 익숙하다는 듯,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엄마 뱃속에서 꼬물거리고 있었노라고 답한다. 때로는 냉장고에 붙어있는 초음파 사진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말 그 시간들이 기억이 나는 걸까. 물론 아닐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자꾸만 묻고 싶어 진다.


그저 우주 어딘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충분히 평온한 존재였던 너를 내가 복잡한 이곳으로 불러낸 건 아닌지.


내가 좀 살아보니, 지구에서 한 인간으로 발 딛고 사는 일이 참 쉽지만은 않아서 아이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얼마 전 한 연예인이 SNS에 아들의 생일을 기념하며 엄마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장문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다.

평생 살면서 갚아도 못 갚을 큰 은혜를 입었다고.

너의 탄생은 엄마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 아니라 큰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므로 엄마에게 꼭 감사인사와 선물을 준비하도록 하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아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담뿍 묻어나는 글이었다. 임신과 출산에 대해 이토록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는 남자는 처음이다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아이의 감사함.

그렇게 꼭 갚아야할 빚에 비유해 강조해야만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 들기도 했다.




아이를 품고 지내는 10달 동안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경이롭다.
콩알보다 작았던 존재가 어느 날엔 손가락 한 마디만큼, 어느 날엔 자몽, 멜론만 한 크기로 커지면서 장기와 손가락, 발가락, 또 그 작은 손톱과 발톱까지 꼼꼼히도 갖춰진다는 게 너무나 신기했다.


심한 입덧 때문에 링거를 맞으면서도 구토를 반복했던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 힘든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지, 임신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다.


극심한 입덧으로 인해 멘털이 무너지자 신체적, 커리어의 희생에만 내 인식의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안정기가 들어서기까지는 몸과 정신이 매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마침 그 당시가 가라앉았던 세월호 선체를 인양하는 작업이 한창이던 때라 TV만 틀면 속보로 그 내용이 보도되곤 했는데, 지친 채 소파 위에 모로 누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날도 많았다.


아이의 뼛조각을 찾을 때까지 물 한 모금 마시는 일조차 사치스러웠다는 한 유족의 인터뷰를 보며 '아 자식을 낳는다는 건, 평생 마음을 졸여야 하는 일이구나'싶어 마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 5개월 무렵부터 통통거리는 아이의 태동이 느껴지기 시작하고, 컨디션도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설렘이 더 커졌다.


그리고 38시간의 진통 끝에
아이를 안았을 때,
그 순간 나는
지난 모든 힘듦에 대한 보상을
일시불로 받았다.


맨 몸에 젖을 찾아 뻐끔거리는 입, 간호사가 하나씩 세어주던 각각 다섯 개의 손가락, 발가락. 벌써 새까맣게 자라나 있던 머리칼은 지난했던 10개월의 감격스러운 이자였다.


건강하게 태어나준 것만으로도 아이는 역할을 다했고, 이전 글 서두에도 적었듯 최소 60년치의 할부를 진 건 바로 나였다.




아이를 키워본 이들이라면 알겠지만, 아이는 엄마의 희생으로만 자라지 않는다. 결국 무거운 제 머리를 들어 올리는 힘도, 땅을 딛고, 기고, 서서 첫걸음을 내딛는 걸음마마저도 아이 스스로 해내야만 한다.


정말이지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고통 속에서 새로운 생을 탄생시킨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대단하다.

그리고, 저 먼 우주에서 길을 잃지 않고 우리에게 기꺼이 찾아와 준 아이도 대단하다.

우리는 모두 동등한 존재라는 것.


나의 엄마에게서 말끝마다 지겹도록 들어왔던 말.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 줄 아니?


가끔은 나도 네 살 딸아이의 괘씸한 반항에 이 말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하지만 꾹 눌러 삼킨다.


사실, 엄마가 되고 나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 말이 반만 맞다는 걸 깨닫는다.


그리고 그런 말을 내뱉는 것으로써는 결코 보상받을 수 없다는 것도.

내 존재는 엄마의 바람이자, 선택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단지 나의 뱃속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무거운 빚을 지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강조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으려니 믿어주기를,

어느 쪽으로든 치우지는 마음은 늘 그늘이 생기기 마련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