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내게 부탁했던 시나모롤 인형이 들어있는 하늘색 사탕부케를 들고 유치원 졸업식에 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덤덤했는데, 막상 시작 시간이 다가오니 묘하게 심박수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달아오르려는 마음을 다잡고 나갈 채비를 했다. 머리를 단정하게 드라이하고, 오랜만에 화장에도 공을 들였다. 진주 귀걸이에 블랙 자수가 수 놓인 블라우스와 블랙 플레어스커트, 블랙 코트를 꺼내 입고 매무시를 살폈다.
거울 속엔 oo의 엄마가 서 있었다.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어봤다. 어느새 눈가에도 입가에도 잔주름이 자릴 잡아 영락없는 학부모의 모습이었다.
'학부모'라는 단어는 아직도 왜 이리 낯설고, 어렵게 느껴지는지.. 가끔씩 '어머님' 소리를 듣거나, 이제 영락없이 나이가 드러나는 얼굴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마음속엔 아직도 자라지 못한 아이가 남아 있어서일까.
어쨌든 아이가 그토록 바랐던 사탕부케를 한 아름 안은 채 유치원에 도착했다.
강당엔 이미 많은 학부모들로 만원이었다. 겨우 뒷 쪽 구석 자리를 찾아 앉고 아이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오후 1시 정각이 되자 학사모를 쓴 아이들이 쪼르르 줄 서 등장했다. 아이들 등장 음악이 어찌나 슬프게 들리던지 무리를 보자마자 눈가가 시큰해지기 시작해 혼났다.
국민의례를 시작으로 (여담이지만 국민의례가 너무 오랜만이라 멘트가 바뀐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6세 후배들의 송사와 졸업하는 7세들의 답사와 졸업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맨 뒷자리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빼꼼거리며 핸드폰의 줌 기능을 이용해 최대한 아이 얼굴을 남기려고 안간힘을 썼더랬다.
딸은 또래에 비해 작은 편이다. 반에서도 제일 작고, 졸업생 중에서도 제일 작은 축이라 무대에서 맨 앞에 서 있었다. 옆에 선 아이보다 머리 하나는 작게 푹 꺼진 우리 딸, 그래도 야무지게 율동하고 노래 부르는 모습이 얼마나 기특하던지. 그날 한 공간에 모인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바라보며 다 같은 마음이었을 테다.
사랑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눈물이 흐를까 봐 내내 눈을 치켜뜨고 끔뻑거리며 앉아있었다.
1년 동안 아이를 잘 돌봐주신 선생님과 아쉬움의 작별인사를 나누고,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텍사스 바비큐 식당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한숨 돌리고 핸드폰 속 사진을 보니 설렘과 어색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란히 서 있는 우리 가족이 들어 있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어딘가 불안한(?) 어리바리 세 사람. 내가 사랑하는 우리의 모습.
파일에 들어있던 아이의 유아성장발달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oo이는 항상 바른 태도로 인사하고 예의가 바른 친구입니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유머 감각이 있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전달하여 말하고, 이해시킬 수 있으며 일상생활과 유치원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실천합니다. 미술적 요소 탐색에 관심이 많고, 배운 노래의 리듬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는 것에 흥미를 보입니다. 다양한 활동에 의욕적으로 참여하며 상황판단력이 빨라 맡은 일을 스스로 계획하고 완성해냅니다."
7년, 내가 30년이 훌쩍 넘는 인생을 살면서 무언가를 이토록 오랜 시간 집중하며 기꺼이 해냈던 적이 있었을까. 공부도, 일도, 운동도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아이 키우는 일은 달랐다.
힘든 날도 많았지만 결국은 행복했고, 늘 기대되었고, 할수록 가슴 충만해지는 일이 내겐 '육아'였다.
앞으로 더 잘하고 싶고, 어쩌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드는 것도 '육아'이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꼭 닮은 교집합인 딸은 그래서 자꾸 나를 더 살고 싶게 만들었다.
몸이 망가지고,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그저 사라지고 싶어질 때도 있었다.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했고, 결국은 버림받았고, 도망쳤고, 끝내 보란 듯 대단한 성취를 이루지도 못한 나 자신이 어떤 때는 영 쓸모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높은 파도처럼 덮쳐와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축축하게 적셔버린다.
그대로 모래처럼 파도에 쓸려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루에 밥 먹는 횟수보다 죽음을 더 자주 떠올리곤 했다.
자꾸 죽고 싶어 지는 마음이 두려워 아이 옆에 누워 냄새를 킁킁 맡고, 볼을 쓰다듬고, 작은 몸을 끌어안아도 마음은 혼란했다.
폭풍 같은 생각이 한 차례 지나가고 나서 폐허처럼 널브러진 생각들을 찬찬히 정리하다 보면 언제나 가장 가운데에 아이가 말갛게 남았다.
더없이 순하고, 건강하고, 속 깊고, 사랑스러운 것. 내가 만든 것 중에 가장 소중하고, 마음에 드는 것. 그리고 내가 가장 잘 한 행동의 결과물.
바로 '아이'였다.
그랬다. 이토록 사랑스러운 아이의 엄마는 다름 아닌 '나'였다.
그때 내 마음에 빛 한 줄기가 새어 들어와서 공기마저 따뜻해진 느낌이었다고 하면 아무도 못 믿을까. 혹은 상투적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건 참이었다.
내가 나로 사는 게 괴로워 못 견디겠으면, 그냥 이 아이의 엄마만으로라도 살아보자고 마음먹었다.
서른 넘어 나를 괴롭히던 엄마에게 버림받았단 사실도 서러워 이토록 망가졌는데,
이제 고작 몇 년 살지도 않은 아이를 등지고 떠날 순, 그렇게 무책임할 순 없었다.
그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오늘이 되었다.
오늘의 나는 시나모롤 사탕 부케를 들고 활짝 웃으며 아이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딸, 졸업 축하해!
그리고 내게도 인사를 건넨다.
축하해!
지금껏 엄마로 살아낸 모든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