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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담 Feb 22. 2024

내리사랑이 싫어 둘째는 없습니다

얼마 전 몇 년 동안 연락하지 않고 지내던 남동생에게서 연락이 왔다.

핸드폰에 동생 이름이 뜨던 그 순간 든 생각은 단 하나였다.

'엄마가 죽은 걸까.' 그렇지 않고서는 동생이 내게 전화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가슴이 빠르게 뛰고 볼과 귀는 달아올라 후끈함마저 느껴졌다. 벨이 울리는 그 짧은 순간에 받을까 말까 고민을 수백 번은 했던 것 같다. 눈을 질끈 감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낯선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어쩐 일이야?"

몇 년 만에 통화한 남매의 대화치곤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첫 물음이었다.

"아니, 뭐 그냥 잘 지내?"

"그럭저럭, 무슨 일 있어?"라고 묻는 말끝은 불안하게 갈라졌다. 동생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동안 손톱으로 손끝을 눌러 통증을 일으켰다. 초조함이 부른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아니, 나 결혼할 사람이 생겼는데 곧 상견례하거든.. 혹시 와줄 수 있나?"


다행히 엄마는 죽지 않았다.

바짝 긴장해 잔뜩 움츠렸던 어깨에 힘이 빠지는 동시에 뒷목 근육은 빳빳하게 뭉쳐 들었다.

"뭐?"

"여자친구가 누나랑 조카 있는 거 알긴 하는데,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으니까 보고 싶다더라고.."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가슴에서 치미는 대로 화를 내 버릴까. 그냥 끊어버릴까. 몇 가지 종류의 생각이 갈래갈래 퍼졌다.

"내가 아직 좀 아퍼. 몸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엄마 생각하면 아직 많이 힘들어.."

"아 난 모르겠어. 나한테 그런 얘기하지 마."

"그래. 알겠다. 내가 많이 힘들어서 상견례 자리 가기 힘들 것 같고, 결혼식도 장담 못할 것 같네. 잘 지내."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어쩐지 내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 묻어 나와 속상했다.

통화는 그걸로 끝났다.


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10cm짜리 혹이 내 간에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기 전,

본인 생일날 이른 아침 전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나오자마자 전화로 내게 온갖 욕을 쏟아내던 엄마. 그날 엄마와 교회에 동행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남동생이었다.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자비한 엄마의 행동을 보고도 동생은 엄마와 내 사이에서 어떤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을 때, 엄마는 남편을 통해 '인연을 끊자'라고 말한 뒤, 엄마와 동생 모두 연락이 끊어졌다. 나도 하지 않았고.


그 이후 처음 하는 통화였다. 동생은 내 안부가 아니라 상견례에 누나 자리를 채울 사람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건 것이다.

'염치'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네이버에 검색하면 '체면을 차릴 줄 알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라고 설명하는 이 마음이 동생에게도 있었다면 그날 내게 그런 용건으로 전화를 할 수 있었을까.

그날의 감정은 '화난다' 정도로 표현하면 너무 가벼웠다. 오히려 차분했고, 차디 차가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나르시시스트 엄마'라는 그늘에 가려져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내 인생의 방관자가 남동생이었음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영웅', 남동생은 우리 집의 영웅이었다. 나르시시스트들은 언제나 가정 안에서 '희생양'과 '영웅'을 선정하고, 서로 다르게 대우한다고 한다. 아들이었던 남동생이 영웅 자리를 차지했고, 나는 희생양으로 자라왔다. 영웅은 희생양의 고난을 묵인하는 방관자이기도 하다. 희생양이 가혹한 대우를 받을수록 영웅의 위치는 더욱 특별하고 고결해진다.


동생은 떼도 많고, 눈물도 많은 아이였다. 밥투정도 심하고, 무슨 일이든 항상 억울해했다. 나는 착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눈치가 빨랐고, 참을성은 좋았다. 동생이 울면 돌은 언제나 내게 날아왔다. 내 방학숙제를 진즉 끝내놓고도, 개학날 동생이 못다 한 숙제를 도와주면 꿀밤을 맞았다. 왜 더 빨리 도와주지 않았냐면서.


밥상 위에 모든 반찬이 늘 남동생 앞으로 쏠리던 광경을 떠올릴 때 아직도 서럽다고 고백하면 좀스러워 보일까?

나한테는 매일 돈 없다고 한탄하던 엄마가 동생이 갖고 싶다고 하면 컴퓨터든, 자전거든 척척 사주었다. 나는 한 번도 갖지 못한 나이키 운동화와 트레이닝복도 남동생에겐 허락되었다.

나는 대학 입학금 지원받는 것도 모멸감을 느끼며 얻어야 했지만, 남동생은 재수와,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3년 동안 엄마의 지원으로 지났다.

자꾸만 시험에 떨어지는 아들에 대한 불만을 엄마는 늘 나를 붙잡고 털어놨다. 부정적인 말들은 결코 아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임신 중 극심한 입덧에 힘들어 친정에 쉬러 갔을 때에도 남동생의 철제 책장은 내가 조립했다.

엄마에게 나는 언제나 '야'였지만, 남동생은 언제나 '아들~'로 불렸다.

'쟤는 아들이니까, 입이 짧으니까, 운동하니까, 쟤는 공부하니까, 손이 야무지지 못하니까, 쟤는 막내니까..' 차마 다 나열하기도 버거운 나와 남동생을 향한 엄마의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었다.   


내리사랑


엄마는 모든 편애의 근거로 '내리사랑'을 들었다.

모든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고. 엄마는 말했다.

어째서, 어디에서 그런 말이 생겨났을까. 어린 마음에는 분노보다 서러움이 차올랐다.

어째서 사랑은 넓게 퍼지지 않고, 아래로만 좁게 흐를까.


동생과 전화를 끊고, 문득 '먼저 태어난 사람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골몰하던 어린 날의 내가 떠올랐다.

'내가 나중에 자식을 낳는다면 아들만 낳을 거야. 만일 첫째가 딸이라면 둘째는 절대로 낳지 않을 거야. 장녀로 사는 설움을 절대로 물려주지 않을 거야.' 생각하던 소녀. 그게 내게 주어진 불합리한 상황에 대한 최대치의 불만 표출이자, 방어책이었다.


‘내리사랑’의 사전적 정의는 이러하다.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함. 또는 그런 사랑.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른다.'

나도 분명 부모의 자식이었건만 어쩐지 그 사랑은 내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동생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편애의 정당한 근거가 됐다.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사람은 그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 폭력적으로 작용하게 될 줄 알았을까.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한 상황 속에서 저울은 항상 남동생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게 당연한 것으로 굳어졌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다 뒤죽박죽 모순이었다는 걸 깨달은 건 내 몸과 마음, 일상이 다 무너진 뒤 전쟁 후 도시를 재건하듯 다시 죽을힘을 다해 살아내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무해하고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내 세상을 다시 세우다 보니 그제야 모든 것이 제대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딸을 낳았고, 어릴 적 내가 마음먹었던 그대로 난 더 이상 출산을 하지 않을 것이다. 딸에게 동생을 '선물'이라고 일컬으면서 희생을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동생이 첫째의 희생으로 자란다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끝에 얻은 결론으로 결심했다.


지긋지긋한 내리사랑이 싫어 내 인생에 둘째는 없다.

나의 딸이 우리 가족 안의 유일한 존재로 사랑받고 살아가도록 남은 생 온 힘을 다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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