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실패기를 통해 보는 나의 집
누군가 내게 "살고싶은 집"에 대해 묻는다면 일단 "볕과 바람이 잘 통하고 엘레베이터 있는 집이요"라는 말을 할 것 같다. 누군가에게 단순하지만, 일단 난 갖고싶다.
본가의 역사를 짧게 모아보자면
내 본가는 오래된 주택이다. 도어락도 에어컨도 없는 집이었다. 나는 3년 전 결혼하기 전까지 쭉 그곳에서 자랐다. 여름에는 에어컨이 없어서 삼베옷을 입고 더워했었고, 겨울에는 냉골인 마루를 지나다보면 오들오들 떨었다. 대문은 열쇠로 열어야 했다. 집에 장독대가 있었고 메주를 쑤었고 앞의 밭에서 상추를 따먹고 같이 김장을 담궜다. 명절이면 찾아가는 할머니집, 우리집이 딱 그런 집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같이 사셔서 집안에 어른들이 자주 왔고 제사를 지내는 집이었다. 벌레도 많았다. 개미, 파리, 바퀴벌레, 모기, 그 외 기타 벌레들. 지금도 집에서 벌레가 나오면 나는 그냥 쓱 가버리고, 남편이 호들갑을 떨며 잡는다. 아마 본가 덕에 내가 벌레한테 무심해졌겠지. 나는 주택이 얼마나 낡을 수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꺼도 마당에 잡초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알고 있어서일까, 전기와 수도만 고치고 살기도 버거운 걸 아니까, 집을 직접 꾸미는 데에 관심이 없어졌다.
무릎 아픈 신혼집
지금의 신혼집은 빨간 벽돌빌라의 5층집이다. 마침내 도어락과 에어컨을 얻었다. 하지만 이와 맞바꾼 것이 있었으니 엘레베이터다. 집에 가는길은 매우 지친다. 역에서 집까지 걸어올라가려면 언덕을 쭉 오르고, 그 언덕옆 꼬불꼬불 계단을 올라가 만난 빨간 벽돌 빌라. 그리고 그 빌라의 맨 꼭데기 층까지 올라간다. 아마 역에서부터 높이를 재보면 10층 정도 되는 높이려니 생각한다. 그나마 전망은 좋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올해 이사를 가고 싶다고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도 이 계단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전세 3년차, 계약 갱신이 한참 남았지만 나는 이 계단을 오르내리는 걸 견딜 수 없었다. 훌쩍 20분 걷고 오는 건 상상할 수 없다. 어떻게 내려왔는데 다시 올라가기엔 억울하니까. 엘레베이터가 있는 집에 가고싶다. 무릎아파서 못 살겠다! 는 마음으로. 그 외에도 자잘한 단점이 있다. 집을 베란다가 둘러싼 구조라 볕은 딱 한 뼘 들어온다. 그리고 이유없이 화장실에서 스멀스멀 냄새도 올라온다. 계약 전 엄마가 지나가듯 지적했는데,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는다.
이사갈거면 집을 사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잠깐 회사 근처에 집을 보러다녔다. 결과적으로 매매도 이사도 포기했다. 이 5층 빌라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 다시 직장을 찾는 입장에서는 현상유지를 한 게 잘된 일이었지만, 그렇게 보러다니던 동네들이 생각난다. 처음 본 집은 4인 가족이 이사를 가려는 곳이었다. 햇살이 잘 들고 맞바람이 치는 작은 아파트. 이제 아이가 자라 큰 곳으로 이사갈 준비를 한다는 가족들이 있던 곳이었다. 다음 집은 할머니가 혼자 사시는 곳이었다. 자개 장롱이 있던 곳이었다. 아파트 앞에 가만히 앉아 할머니들이.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 그 아파트에서 역까지 걸어가보고, 장을 볼 것처럼 마트에 가보기도 했다. 나는 그 오래된 아파트들이 주는 안정감을 좋아했다. 대부분 어르신들이 많아 조용했고, 나무가 많은 이 동네에 살고싶었다. 여름의 매미소리는 각오하면서.
집을 알아보면 생경한 단어를 들어볼 수 있다. 호재, 역세권, 몰세권, 초품아, 입지. 나에게 이런 단어를 말해주던 부동산 아저씨는 집을 꼭 물"껀"이라고불렀다. 이력서를 쓰기 힘들때마다 취직하고 꼭 이사를 가겠단 마음으로 집을 보고 있다. 이왕이면 내가 살고싶은 곳이 어딜지 쇼핑하는 마음으로. 장바구니 대신 위시리스트에 물건을 담는 마음이 비슷하지 싶다. 네이버지도, 호갱노노 어플을 켜고 동네들을 찾아보면서 생각한다. 조용한 동네면 좋겠다. 병원이 집에서 가까웠으면 좋겠고, 좋은 도서관이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 훌쩍 20분만 걷고 와도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주 집에 나를 가두게 될 테니까. 지하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가 있을 지역까지는 한시간 정도였으면 좋겠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집에 오랫동안 있어서일까, 집 안도 자주 생각한다. 잠을 자는 공간과 일하는 공간이 분리되는 것도 중요하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실리콘밸리를 떠난다는 미국 상황처럼, 혹은 미래의 직장 모습을 상상한 BBC의 인포그래픽처럼 우리나라에도 재택이 활성화되어 일주일에 한두번만 사무실에 가도 된다면, 그땐 정말 멀리 있는 곳에 살아도 될까? 교통이 아주 편하지 않더라도 집이 깨끗하고 넓은 걸 고를 수 있다면 그땐 나도 집을 살 수 있을까? 그때는 남편과 책상을 두고 싸우지 말고 책상을 하나 더 둬야지. 서재를 하나만 더 가져야지. 그땐 집안에 바람도 볕도 잘 들어서 화분 하나쯤은 키워도 될거야.
이전에 청년 주거 문제를 해결하려던 조직은 스스로를 민달팽이라 불렀다. 아직 들어갈 집이 없는 스스로를 빗댄 것이리라. 이왕이면 달팽이 껍질보단 나를 품을 수 있는 둥지였으면 좋겠다. 지금도 나와 남편은 집이 말썽을 부릴때마다 "김둥지 또 저런다"라고 한다. 집이 유기체같아서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집이 유기체다"는 표현은 이 책). 김둥지 1호는 유효기간이 있겠지만, 앞으로 내가 나뭇가지를 엮듯이 애정으로 가꿀 수 있는 둥지를 간절하게 가지고 싶다.
+다음엔 내가 가 보았던/내가 살았던/내가 살고싶었던 동네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