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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얀 Sep 11. 2021

이사가는 마음

새로운 동네에 뿌리내리고 싶어서

이전에 내가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지나가듯 이렇게 써두었다.

조용한 동네면 좋겠다. 병원이 집에서 가까웠으면 좋겠고, 좋은 도서관이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공원이 있으면 좋겠다. 훌쩍 20분만 걷고 와도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주 집에 나를 가두게 될 테니까. 마트는 좀 가까웠으면 좋겠고, 지하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회사가 있을 지역까지는 한시간 정도였으면 좋겠다.
우리나라에도 재택이 활성화되어 일주일에 한두번만 사무실에 가도 된다면, 그땐 정말 멀리 있는 곳에 살아도 될까? 교통이 아주 편하지 않더라도 집이 깨끗하고 넓은 걸 고를 수 있다면 그땐 나도 집을 살 수 있을까? 그때는 남편과 책상을 두고 싸우지 말고 책상을 하나 더 둬야지. 서재를 하나만 더 가져야지. 그땐 집안에 바람도 볕도 잘 들어서 화분 하나쯤은 키워도 될거야.


글을 쓴 뒤 나는 순환재택을 하는 회사에 취업했고, 월요일에 이사를 간다. 그동안 살던 동네에서도 회사에서도 가깝지 않은 집이다. 다만 오래된 신도시고, 나무가 우거진 모습이 좋았다. 처음엔 이 동네로 이사갈 생각이 없었다. 눈여겨 보던 동네가 대출받을 수 없는 금액 이상으로 집값이 오르자,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동네 추천을 받았다. 여기에 통근하기 좋은 동네가 어디인지. 그 중, 옆자리 동료가 추천한 곳을 방문하면서 하지만 빨간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걸으며 이 도시에 첫눈에 반했다. 내 나이와 비슷한 도시. 사실 언덕 있는 집에서 평생을 살아서 평지로 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는데, 이름부터 "평"자가 들어가는 곳이다.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오래된 아파트가 주는 안정감이 있는 동네. 누군가는 이런 구축 아파트들을 두고 썩다리 아파트, 몸테크라는 말로 부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동네라는 점에서 일단 안심이 되었다. 공원과 도서관이 바로 앞에 있으니 말이다.

처음 빨간버스에 내렸던 날 보았던 동네 풍경들. 그래서 이 곳에서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이사를 가면서 한 가지 슬펐던 것은 서울을 떠나는 것이었다. 서울을 떠난다는것을 "밀려난다"는 감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자체보다는 일단 쭉 살아온 후암동에서 멀어지는게 아쉽다. 결혼하고도 본가인 후암동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기 때문일까. 후암동이 자꾸 그리울것 같다. 골목이 꼬불꼬불하고 언덕이 심하지만, 지하철이 없지만, 남산이 옆에 있고 좋은 도서관이 있는 곳. 서울 어디나 가까이 갈 수 있는 곳. 병원과 마트는 조금 멀지만 재래시장이 있는 곳. 여전히 언덕이 심해 아파트가 생기기보단 조그만 협소주택들이 생기고 있는 곳.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사실 후암동 중 평지쪽이 요즘 도심 내 협소주택의 메카긴 하다. 아파트를 지을 수 없는 언덕배기 동네기도 하고, 워낙 어디로든 가기 좋은 곳이니 그런가보다. 나도 후암동에 쭉 살고싶어 협소주택도 잠깐 생각해보았지만, 인테리어도 버거운데 건축이 왠말인가 싶기도 했고 인생에 한 번쯤은 엘리베이터있는 집에서 살고싶어서 포기했다. 단, 우리집이 있는 남산 밑자락 언덕이 아닌 후암시장 쪽으로. 이쪽은 평지이니까. 아, 지금 동네는 이제 지겨워서 떠나고 싶다.


오랫동안 한 동네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 내가 살 동네를 정할 수 있는 건 무슨 기분인지 궁금했었다. 지인은 결혼을 하면서 등록기준지를 바꿨다고 했다. 이 동네에 뿌리를 내리고 싶다는 마음으로. 올해 태어난 지인의 아기는 그 주소를 품고 살아가겠지. 그 아이의 유년기에 남을 풍경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7월에 30년짜리 대출을 신청하면서 대출 만기기간인 2051, 이라는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년에 내가 어디에서 일할지 몰라 정착하는 게 두려웠던 내가 이제 뿌리를 내린다고 결심했다. 1년도 내다보기 힘들었는데, 쉰 둘의 삶을 상상해본다. 1년보다 더 멀리 내다보고 살 수 있는 인생. 출근하러 눈뜨기 너무 싫은데 그래도 대출금을 갚아야 하니까 그런 삶. 어느 중간에 나는 이 동네를 떠나게 될까. 아마도 30년까지는 살지 않겠지만, 적어도 몇 년간은 있을 수 있는 동네이기를 바라본다.


저번 글에도 말했듯, 나와 남편은 종종 집을 "둥지"라고 부른다. 현재 살고 있는 집도 501nest라고 불렀으니까(501호다). 이번엔 진짜 눈치 안 봐도 되는 내 둥지라 부를 수 있겠지. 이번 이사가 무사히 끝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둥지 옮기기 프로젝트"를 준비해본다.


부록으로 붙여보는 동네 시리즈

#본가 동네 후암동

결혼하기 전인 2017년까지 살았던 동네다. 원래 후암동은 무시무시한 언덕이 있는 곳이다. 나는 집에 갈때마다 종종 골목 사이로 보이는 서울 야경을 찍어두곤했는데, 언젠가 그곳이 “루프탑”들이 넘쳐나는 골목이 되어버렸다. 이 변화가 반갑기도 하지만, 원래 살던 분들이 부자가 되서 나가셨을지 쫓겨나셨을지 살짝 걱정이 된다. 용산 02번 버스는 남영역과 해방촌 오거리와 녹사평을 구석구석 이어주는 버스인데, 요즘도 가끔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단점이 있지만, 언젠가 다시 후암동에 돌아와 살고 싶다. 아 남산밑 말고 언덕 없는 서후암동 쪽으로.(둘을 나눠 부르는게 신기한 일이다.)


장점   

도서관이 가깝다.

숲이 예쁘다. 아마 용산미군기지가 빠지면 거기가 큰 공원이 될테니 공원도 가깝다.

교통이 좋아 서울 어디나 가기 좋다. 강남도, 종로도 30분컷.

개성있는 가게들도 많다.

단점   

지하철 없는 동네다. 그래서 마을버스 용산 02번이 사랑받는다.

주차가 미친듯이 힘들다. 골목에 기기묘묘하게 차를 세워놓는다. 차 가진 분들께는 비추. 사실 그래서 차를 포기하면 된다..

언덕이 무시무시하다. 눈 한번 오면 다들 일치단결해 눈을 치운다.

이상하게 병원이 잘 없다. 요즘은 생긴것 같은데, 어렸을때부터 내과 외에 다닐만한 병원이 부족해 병원 유목민이었다.

#현재 동네 효창동

정확한 위치는 효창동과 공덕역 사이다. 일명 용마루 고개라 부르는 곳인데, 4년동안 살았던 곳이다. 나는 이 곳이 신기한게, 주거지역과 직장인 지역이 붙어있다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 일명 갈매기 골목에는 술취한 분들이 거리에서 두세분씩 발견되지만 5분만 걸어가면 바로 주거지역이 나온다. 그리고 공덕역 뒤편으로 큰 아파트단지가 있어 많은 편의시설이 있다. 한동안은 공덕역에서 지하철 타고다니는 직장 다녀서 좋았는데, 강남/판교쪽은 출퇴근하기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장점   

병원이 유난히 많다. 골라 다닐 수 있음.

경의선 숲길이 근처라 늘 걸어서 홍대까지 걸어갈 수 있다.

그러고보니 이태원과 홍대 사이다. 하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핫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었고, 잘 활용하지 못했다.

지하철역 근처에 작고 좋은 식자재 마트들도 많다. 최근 공덕역 너머쪽에 생협이 생겼다. 팽이버섯 삼백원.

단점   

도섬지와 여의도 가기 좋지만 강남/판교 가기 정말 힘듦. 보통 한남동까지 가서 버스타거나 지하철 3번 타고 다녔다.

도서관이 근처에 없다. 용산 꿈나무 도서관이 있지만, 책도 적고 코로나 때 가장 먼저 문닫는 도서관이라 남산도서관으로 가는 중.

이마트가 지척인데 배달이 안 된다. 용산구와 마포구 월경지라 그런가.

카페/빵집들의 물가가 비싸다. 떠나면서 생각날 법한, 아쉬운 카페도 맛집도 없을 듯하다.


마음에 담았던 동네

1.마포구 망원동

홍대 옆이고 이미 핫플레이스가 많지만, 나는 사람냄새 나고 활기찬 느낌을 주었던 동네 골목을 좋아했다. 그리고 망원시장이 큰 점도 마음에 들었다. 다수의 에세이에서 망원동 예찬이 나온다. 실제로 망원동을 갔다가 그 동네에 사는 지인한테, 문득 “망원동 살고싶어요!”하고 뜬금없이 톡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여기 산다면, 반찬과 두부가게를 매일 드나들었겠지. 근처에는 마포중앙도서관도 있고, 좋은 동네 서점 두어 군데가 있는 점도 마음에 든다.

2.강서구 가양동

이전 글에 나왔던 전 회사 근처인데, 여기가 아까 내가 말한 오래된 아파트가 있는 곳이었다. 혼자 다닌다면 조금 어두울 수도 있겠지만 9호선 가양역이 가까워 강남 가기도 나쁘지 않고, 한강이 옆에 있어 포근한 느낌이었다. 나는 이 동네에 살고싶어 정말 몇 번이고 온라인 임장+실제 임장 등등을 다녔었다. 그리고 부동산 불장과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호재가 실현된다면서 집값이 미친듯이 올랐다...

3.노원구 하계동

하계동에는 남편 친구의 집들이를 가게 되었는데, 역에서 나오자 노원구 전용 마트가 있었고,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는 유난히 숲이 우거진 느낌이었다. 사람 사는 동네 느낌이 나서 좋았다.

4.분당구 정자동

남편은 스무살 이후 계속 자취했고 신촌집, 가산집을 거쳐 판교 직장을 다닐때 정자동에 살았다. 남편이 5년동안 살았던 곳이라 나도 자주 갔었다. 보통 아파트촌인데 반지하 원룸에서 자취를 했었다. 이곳도 나무가 좋고 무엇보다 탄천을 정말 좋아했다. 첫 회사 주말근무 끝나고 욕하면서 탄천에서 맥주 한 캔 마시는 게 낙이었었다. 전반적으로 밥상 물가가 비쌌고, 특이하게 주거지역 근처라 그런지 먹을만한 백반집이 없었던게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5.용인시 수지구 동천동

지하철역과 상가에선 멀지만 개천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고 조금만 더 나가면 상가 지역이 있었던 곳이었다. 완전 아파트 상가만 있는 곳은 아니어서 오히려 더 낯이 익은 곳이었다. 좋은 도서관인 느티나무도서관 세권이어서, 몇 년동안 계속 살고 싶었던 동네였지만 아슬아슬하게 예산을 넘어 포기..

예산을 생각하면 택도 없어 포기했지만, 전망이 무척 좋아 아직도 기억에 난 집이었다. 이 집은 우리가 본 뒤 하루만에 나갔다고 한다

6.용인시 성복구

1~6번 중 가장 새 건물이 많았던 곳이었다. 지하철역을 나오면 반짝이는 아파트들이 있고, 롯데몰이 반짝이는 풍경은 잊히지 않는다. 집을 구경하고 롯데몰 안에서 밥을 먹었는데, 사람들이 슬리퍼를 끌고 나와 밥을 먹는 풍경은 여유로워보였다. 내 통장도 살살 녹겠다 싶어 포기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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