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와 케이팝은 여러 가지 면에서 훌륭한 만남이 됩니다. 학습 동기 유발이나 흥미 조성의 측면에서도 케이팝은 유용한 수업자료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사께 용서를 구하면서 걸그룹 에스파의 광야로 나아갑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山脈)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季節)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 향기(梅花香氣)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曠野)’
이육사(李陸史, 1904~1944)
어려서 유학자인 조부 아래에서 공부함. 커서는 항일 운동가로 활동함. 23세 때 조선은행 대구 지점 폭발물 사건에 관련되어 옥살이를 함. 당시 수인 번호가 264번임. 호 ‘육사’는 여기에서 비롯됨. 39년 인생에서 17번 옥살이를 함. 칼과 펜을 함께 잡은, 당시 보기 드문 유형의 독립운동가로서 북경 감옥에서 사망함.
‘광야’는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가 자신의 역사관과 신념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시적 화자는 이 광야의 아득한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는 모습을 그려보고, 우리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광야의 시간은 천지 창조의 까마득한 태초부터 천고의 뒤라는 미래 시간까지 많은 시간이 압축되어 무한한 시간성을 드러낸다. 광야의 공간은 끝없이 넓은 공간을 제시하여 공간 의식도 무한히 확대되어 있다. 이러한 시간적 무한성과 공간적 광활함은 우리 민족의 터전이자 삶의 공간인 광야를 신성시하기 위해서이다. 당연히 이 신성불가침 한 땅을 침범한 일제의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다.
에스파(aespa)
2020년 11월에 데뷔한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의 4인조 다국적 걸그룹.
‘광야’ 수업을 위해 학습 동기를 부여하고 흥미를 불러일으키자면, 육사님께 잠시 양해를 구하옵고 나무위키와 블로그 artmate23의 해설을 좀 이용하는 수밖에.
육사의 광야와 에스파의 광야
육사의 ‘광야’가 우리 민족의 신성한 삶의 터전을 상징한다면, 에스파의 ‘광야’는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무규칙의, 무정형의, 무한의 영역을 상징한단다. 그런데 이 광야가 SM 컬쳐 유니버스(SMCU)의 메인 배경이 된다고 하네. 앞으로 에스파뿐 아니라 다른 SM 가수들의 중요한 역할과 배경이 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SM에서는 이 광야를 상표 등록까지 해 놓은 상황이란다.
아, 이건 아닌데. 학창 시절 육사의 광야를 배워온 우리들은? 따지고 보면 광야의 저작권은 육사한테 있는 거 아닌가. 광야든 KWANGYA든. 신화의 멤버 김동완 주연의 ‘절정’이란 영화가 있다. 육사의 삶을 조명한 그 영화에서 등에 업힌 육사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 여사께라도 여쭤 봤는지...
참, 케이팝과 함께하는 문학수업이기에, 에스파의 <넥스트레벨>에 나오는 ‘광야’를 불러와야겠다. 웬? 뜬금없이? 이런 반응이 결코 아니길 바라면서.
육사의 세계관(世界觀)은 그가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독립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민족 또는 민족의 독립이란 걸 우린 알고 있다. 반면 걸그룹 에스파의 세계관은 현실세계의 멤버와 가상세계에 존재하는 아바타 멤버 ae[아이]가 디지털 세계를 통해 소통하고 교감하며 성장해간다는 스토리텔링이 바로 그것이라는데.
그렇담 제일 먼저 나온 Black mamba, 그다음 Next level, 그리고 마지막 Savage에 나타난 에스파의 세계관을 간략한 서사 구조로 한번 살펴보자.
육사와 에스파의 세계관
우선 에스파의 데뷔곡 <Black mamba>는 빌런 블랙맘바(무시무시한 뱀의 일종)가 등장해 현실세계의 사람인 에스파와 ae(가상세계 속 에스파의 또 다른 자아)들의 연결을 끊어놓는(이걸 싱크아웃이라고 함) 내용이고.
난 세상 중심에
You're in the flat
내 모든 action
어린 너의 힘을 키워
넌 언젠가부터 Synk out
노이즈같이 보여
더 이상 못 찾겠어
널 유혹해 삼킨 건, black mamba
(중략)
넌 광야를 떠돌고 있어
나의 분신을 찾고 싶어
다음 <Next level>은 그런 블랙맘바(에스파와 ae는 서로 소통하고 교감하는데 이 소통을 끊어버리는 존재가 블랙맘바임)를 무찌르기 위해 에스파와 ae에스파(에스파의 버츄얼 아바타)가 광야로 떠나는 내용이다. 그런데 SBS 대통령 선거 개표방송에서 광야로 질주하던 후보들이 에스파의 디귿(ㄷ) 춤을 추는데 이 영상이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I'm on the Next Level Yeah
절대적 룰을 지켜
내 손을 놓지 말아
결속은 나의 무기
광야로 걸어가
알아 네 Home ground
위협에 맞서서
제껴라 제껴라 제껴라
(중략)
I'm on the Next Level
저 너머의 문을 열어
Next Level
널 결국엔 내가 부셔
최근에 나온 <Savage>는 에스파와 ae가 나이비스(조력자)의 도움으로 광야로 가서 블랙맘바와 맞서게 되는 순간을 그린 곡이다. 블랙맘바의 환각퀘스트 공격을 받아서 위기를 맞지만 결국 물리치고 싱크(에스파와 ae에스파 사이의 소통과 교감을 싱크라고 함)를 회복하는 그런 스토리가 담겨있다는 것.
그것 봐 난 좀 Savage
너의 재생력을 막아
흐트러놔 빼놔
잊지 말아 여긴 바로 광야
너의 시공간은 내 뜻대로
Make It break it
I’m a Savage
널 부셔 깨 줄게 Oh
세계관이란 게 참으로 어렵고 난해하다. 엑소가 처음 데뷔할 때도 초능력의 소유자 컨셉의 세계관을 제시했다. BTS 또한 화양연화 관련 다양한 세계관이 있다고 한다. 이제 우리의 케이팝은 이렇게 진화하고 발전한다. 긍정적인 시선으로 볼만 하다. 그러나 아이돌 세계관에 대한 공부도 빡세게 해야만 우리가 팬질이나 덕질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은 씁쓰레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