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요
"여수는 밤바다가 유명하니까 꼭 눈에 담고 와.”
처음으로 부모 없이 여행을 떠나는 아이에게 이야기한 나의 첫마디이다.
4박 5일 치의 짐을 넣으려고 하니 큰 배낭이 필요했다. 새로운 배낭을 산다고 하니 벌써부터 아이는 설레는 모양이다. 새로운 배낭이 도착하고 가져갈 짐에 하나하나에 이름을 쓰고 붙였다. 짐 싸기 과정부터 스스로 해야 한다고 하여 혼자 하도록 지켜보기로 했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아니 천불이 났다. 이것도 가져가고 저것도 가져간다며 배낭이 넘치도록 짐을 꾸렸다. 결국 배낭이 너무 무거워져 이것 하나 뺐다가 저것 하나 뺐다를 반복했다. 이를 악물며 옆에서 정리를 도왔다. 다음 날 아이는 자기 키의 절반 크기의 배낭을 등에 메고 집합장소인 수유역을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배낭이 하나도 무겁지 않다는 허세와 함께.
버스 정류장 옆에는 큰 입간판이 서 있었다. ‘30년 전통 xx학원의 입시전문 방학특강’. 재미난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온갖 학원들의 간판과 현수막 문구가 그렇게나 눈에 들어왔었다. 지금 당장 전화를 해 상담을 해야 할 것만 같은 긴박함을 가지고 모든 홍보 문자들이 나를 향해 달려왔었다. 신기하게도 지금은 학원조차 눈에 잘 안 띄는 데다가 여러 문구들을 본 들 아무런 울림이 없다. 나 역시 아이만큼 적응이 빠른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는 아이에게 탄산음료 먹지 말고 물놀이 조심하라고 덧붙였다. 출발하고 얼마 후 담임교사 연두가 사진을 보내주었다. 사진에는 KTX를 타고 여수를 향하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아이의 자리 앞에는 콜라페트병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두 눈을 의심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날 아이의 다리는 물놀이를 하다 다쳐 밴드로 감겨 있었다. (이 부분은 다소 예상되었다.)
엄마의 당부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다.
아이의 왼쪽 귀로 흘러들어 가 오른쪽 귀로 흔적도 없이 나가는 것. 그 어떤 울림도 없이.
물론 처음에 이야기한 여수의 밤바다도 아이의 기억에는 남지 않았다. 슬프지만 그랬다. 나에게 정말로 필요하다고 느끼면 알아서 귀에 꽂히는 거겠지 싶다. 학원의 입간판이 아무리 현란한 색을 하고 좋은 강사소개로 휘감겨 있다고 한들 지금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네이버카페에는 매일 저녁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쓰는 여행후기가 올라온다. 여행 첫째 날 콩나물을 좋아하는 아이는 식당에서 콩나물 반찬을 9번 리필해서 먹었다고 한다. 창피했다. 둘째 날은 다른 식당에 간다는 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밤에는 근처 학교 운동장에서 신발을 던지며 놀기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며 더없이 즐거워 보였다. 빗질을 안 해 까치가 놀라 도망갈 머리도 엄마와 함께였다면 먹지 못했을 풀토핑 아이스크림도 피곤해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모습도 부모와의 여행에서는 느끼지 못했을 또 다른 즐거움으로 가득해 보였다.
아이는 이런 여행들의 경험으로 가족여행 때 목적지 경로를 먼저 알아본다거나 주변 맛집을 살펴본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어른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다만 옷이 몇 개 필요한지 칫솔, 치약은 챙겼는지 정도는 확인할 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경험을 쌓으면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리라 믿는다. 언젠가 혼자 짐도 척척 싸고 경비는 모은 돈으로 사용하겠다며 “어머니 다녀오겠습니다.” 하고 집을 떠나면 그도 그것대로 서운한 일이긴 할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