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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완자 Oct 27. 2024

재미난 생활백서

시간표? 직접 짭니다.


학원 숙제에 얽매여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재미난학교 입학 준비 때부터 아이의 모든 학습학원을 끊었다.

초등 때의 선행학습이 무색하게 아이는 학원을 반년 가까이 다니지 않자 모든 것을 잊었다. 그렇게 생긴 많은 자기만의 시간을 아이는 대부분 집에서 뒹굴거리며 지내고 있다. 아이는 침대는 절친, 소파와는 찐친이 되었다. 그들과 거의 한 몸이 되어 인간의 자세가 저렇게도 가능한가라는 실험이라도 하는 듯 기이한 포즈로 책을 보고 눕고 엎드린다. 입안에서 집게가 나올 수 있다면 나의 잔소리 폭격과 함께 집게로 집어 책상 의자에 앉히고 싶다는 충동에 종종 사로잡힌다.


대안학교에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없던 자립심이 생겨나고 스스로 하고자 하는 바를 금방 찾아내서 나만의 길을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열 과목이 넘는 과목을 아침부터 오후까지 쉼 없이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대부분 일방적인 선생님의 설명을 듣는 지금의 일반 학교의 수업모습은 우리가 학교 다닐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 학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엉덩이 힘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 아이는 엉덩이에 그 어떤 근육도 뼈도 없는 아이처럼 일방적인 설명만 하는 수업을 유독 견디기 어려워했다.


책은 그림으로 절반이 채워져 있었고 모든 과목명은 매직 또는 볼펜으로 제목이 바뀌어 있었다. 등장인물의 눈은 모두 검은색 또는 구멍이 나 레이저를 쏘고 있었다. 수학인지 미술인지 알 수 없는 좋게 말하면 모더니즘적인 책제목이 즐비했다. 그렇다고 국어, 수학, 과학, 사회 이런 교과 과목에 흥미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좋아하는 아이는 스스로 공부해 한국사능력시험에 도전해 보기도 하고 두꺼운 과학책을 흥미롭게 몇 번씩 읽기도 한다. 같은 내용일지라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해주는 일방적으로 느껴지는 설명식의 수업이 재미가 없었을 뿐이다.


재미난학교에는 학기 초에 시간표를 학생들 스스로 짜는 시간이 있다. 시간표 자체를 학생들이 배우고 싶은 과목으로 채운다. 각자 배우고 싶은 과목을 이야기하고 스스로 PPT를 만들어 자기가 원하는 과목을 어필하는 시간을 갖는다. 역사를 좋아하는 아이는 역사수업을 꼭 시간표에 넣고 싶어 나름대로 공을 들여 PPT자료를 만들어 발표했지만 아쉽게도 첫 학기 시간표에는 들지 못했다. 매해 재미있는 점은 아이들이 싫어할 것 같은 영어, 수학이 꼭 시간표에 들어간다는 점이다. 물론 아이는 수학수업을 2시간 하느냐 1시간 하느냐의 거수결정에서 1시간 수업에 두 손을 모두 들었다고 들었다. 안타깝게도 수학은 2시간으로 결정되어 아이는 입이 쭈욱 나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직접 만드는 시간표이니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번 학기말 평가에서 아이는 재미있었던 수업을 이런 순서로 나열했다.


몸활동->친구수업->나들이->과학->여행준비->팀프로젝트->개인프로젝트->영어->수학->진로->성교육

(일반학교에서 과목으로 치는 수업은 4번째 처음 등장한다.)


예전에 학원 숙제를 안 하고 뒹굴 거리는 것을 보며 닦달하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인내는 차라리 달지도 모른다. 교실 속에서의 배움뿐만 아니라 나들이, 여행, 팀프로젝트 등등 곳곳의 배움 속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고 믿는다. 언젠가는 우리 아이도 바닥에서 올라와 의자에 앉는 날이 오겠지. 그러다 어떤 날은 스스로 무언가 해보려고 시작해 보는 날도 오겠지. 오늘도 그저 기이한 모습으로 마루에서 뒹굴고 있는 아이에게서 애써 눈을 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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