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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미녀 Nov 08. 2021

퇴사한 지 4개월

어떻게 지내나요?

11년 된 커리어를 뒤로하고 퇴사한 지 어언 4개월. 세월이 빠르다 싶다. 한여름의 어느 날, 눈물짓는 후배를 한번 끌어안아주고 뒷자리에 짐을 가득 실은 채로 자유로를 달렸던 그때. 꿈만 같다. "슬픈 꿈을 꾸었사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느낌이랄까.


퇴사를 하고 난 바로 1주, 2주 정도까지는 그저 휴가를 낸 것 같았다. 인수인계하고 온 잔업들이 계속 떠올랐다. 괜스레 내가 하던 작업과 관련된 것들을 찾아보았다. 업계 소식을 뉴스 기사에서 검색해보기도 했다. 미처 연락을 다 끝내지 못했던 관계사 사람들과 카톡을 몇 차례 주고받았다.


그렇게 1개월, 2개월 지나자 이제 나는 완전히 내 일로부터 해방이 된다. 업무 시간 내내 수시로 울렸던 전화와 메신저는 이제 조용하다. 각종 회의에 끌려다녀서 늘 머릿속을 지배했던 업무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진다. 혼자 집에서 차려먹는 점심이 익숙해진다. 평일 오전에 홈트를 하고 오후에는 책을 읽는 생활이 습관이 되었다. 이렇게 나는 그 사회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내 커리어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다. 00회사 00팀의 00이었던 나는 더 이상 없다.




그리고 이제 4개월 차. 저번 달에는 후배로부터 카톡이 왔었다. 급증하는 코로나 확진자 때문에 약속했던 날짜를 미루고 "조만간 만나"라고 이야기했다. 위드코로나가 된 지금, 후배에게 연락을 해도 되는 걸까? 업무와 관계없는 선배를 만나는 것이 부담이거나 귀찮은 일은 아닐까. 나는 회사에 있을 때도 늘 이런 생각을 했다. 요즘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하는 것조차 쉽지 않으니까. 나는 왜 이렇게 솔직하지 못할까. 그러니 어쨌건 연락은 해봐야겠다. 연락하고 싶으면 연락을 하는 거다. 솔직하게. 고마운 내 후배에게.


맞다, 퇴사를 하고 나서 무척이나 크게 변한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좋은 것을 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말은 이렇게 썼지만 사실은 지출이 엄청나게 늘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파이어를 했을 때를 가정해서 영수증을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그때의 영수증은 완전히 틀렸다. 지출이 수배 이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좋은 것을 한다는 것은...


첫째로, 좋은 코트를 샀다. 나에게 잘 맞는, 어울리는, 촉감이 좋은 코트를. 부동산 대금을 제외하고, 난생처음 그렇게나 커다란 거금을 결제하는 카드를 내밀면서 손이 떨렸다. 이번에 좋은 코트를 사면서 느낀 것은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게 진짜라는 거다. 옷의 질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특히나 옷을 살 때 그렇게나 강력한 친절함은 처음 겪어봤다는 것이 포인트. 생전 처음 보는 셀러인데 마치 몇 년된 친구 같이 느껴졌다. 그만큼 나에게 맞춰줬기 때문이겠지. 코트를 고르는데 한 시간 가량을 보내면서 나올 때는 셀러와 카톡 친구도 맺었다. 오는 길에도 꽤나 흥분한 채로 셀러를 칭찬하고 있자니, 같이 갔던 남편이 그 사람은 그저 판매를 위한 것뿐이란다. 명품관 쇼핑은 원래 이런 걸까?


둘째로, 좋은 음식을 먹는다. 회사를 다닐 때는 말 그대로 대충 때웠다. 특히나 같이 먹을 동료가 없어서 점심은 늘 혼자였는데, 그러다 보니 빵 한 조각으로 끝낼 때도 많았고 편의점 음식도 개의치 않고 자주 사 먹었다. 그리고 꽉 막히는 퇴근길을 헤치고 돌아와서는 배달음식을 시켜먹기 일쑤였다. 주말은 또 주말이랍시고 외식을 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식습관을 매일 같이 했다. 그런데 지금은 신선한 재료를 사서 내가 요리를 한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자 최근 피부가 좋아졌다. 음식 때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아졌다. 피부과에 들일 돈이 굳어서 기쁜 마음이.


셋째로, 엄마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건 나한테도 엄마한테도 좋은 일이니까 좋은 것이라고 해본다. 회사를 그만두고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생각해왔던 엄마와는 다른 모습의 엄마가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늘 활기차고 건강한, 화려한 구두와 머플러를 좋아하는 멋진 여성이었는데, 어느덧 무릎이 아파지고 눈이 흐릿해진, 낮은 통굽을 신는 여성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더 건강하실 때 더 많은 것을 해보는 것이 목표이다. 지난 4개월 동안 엄마와 여행도, 산행도, 나들이도 꽤나 많이 다녔다. 다음 달에는 겨울 바다 여행을 갈 참이다. 더 많은 사진을 찍고, 더 많이 웃고,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


이렇게, 지금의 나는 밋밋하다. 똑같은 것을 하고 똑같은 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훨씬 더 좋아졌다.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기억을 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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