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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달 Mar 03. 2020

백수의 정신건강을 위협하는 것들에 대하여

세 부재


작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꽤 우울했다. 나는 우울하면서도 내가 우울하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스트레스의 주 원천이었던 일에서 벗어나 있었고, 내가 좋아하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연애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로울 일이 없는데도 우울하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 ‘이상 현상’의 원인을 오래 탐구했다. 마침내 도출한 결론은 세 가지의 ‘부재(不在)’다.


첫째, 몸의 감각 부재. 

퇴사 직후였던 봄엔 낮에 책 한권 들고 연남동 거리를 걷기만 해도 행복했다. 세상과 내가 함께 살아있다는 감각이 충만했다. 매일 밤엔 한강공원에 나가 1시간30분 정도씩 운동을 했는데, 몸과 마음이 함께 건강해짐을 느꼈다. 그런데 7월 중순 이후 여름이 절정에 달하면서는 낮에 외출을 꺼렸다. 나가더라도 도보 이동을 최소화했다. 걷는 게 즐겁지 않았다. 밤에 운동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습도가 높아 숨을 들이쉬는 게 무겁게 느껴지니 운동을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몸이 둔해지자 기분도 침잠했다.


둘째, 돈 쓰는 재미의 부재. 

퇴사 전엔 씀씀이를 줄이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줄어 이른바 ‘시발 비용’을 쓸 일이 없어질 테니 돈을 좀 안 써도 괜찮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도시 생활에서는 많은 기회가 지출과 결부돼있다. 좋은 공간을 즐길 기회, 좋은 물건을 써볼 기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 좋은 걸 먹고 마실 기회 등에 지출이 따른다. 다달이 몇 백 만원이 통장에 꽂히던 때엔 ‘이 정도야 뭐’ 생각하며 소비하던 것들에 대해  ‘이 돈이면 밥이 몇 낀데’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문제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고민하는 나 자신이 지질하게 느껴져 괴롭다는 점이다.


셋째, 성취하는 경험의 부재. 

일을 한다는 것은 내 지식과 노동을 활용해 어떤 식으로든 산출물을 만들어낸다는 걸 뜻한다. 기자를 할 땐 거의 매일 뭔가를 썼다. 좋든 싫든, 결과물의 질이 어떠하든, 뭔가를 생산하고 성취하는 경험을 매일같이 했다.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결과물을 내는 과정과 결과물 그 자체가 내게 큰 에너지와 보람을 준 것도 사실이다. 매일의 성취에서 쌓인 힘이 그 다음의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이었다. 지금은 성취하는 경험이 없으니 일상에 탄력이 떨어진다.


우울함의 원인을 모를 때는 답답해서 힘들었고, ‘돈을 못 쓰니 우울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는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원인을 명확히 하고 난 뒤엔 마음이 전보다 편해졌다. 정신승리인지 모르겠으나, 나름의 해법도 찾았다.


다행히 무더위는 가셨다. 요즘은 아침에 공기가 시원하다고 느끼며 눈을 뜬다. 기분이 좋다. 밤에 한강공원 걷고 뛰기를 다시 시작했다. 소비에 대해선 좀 관대해지기로 했다. 내 젊은 날은 한 번 뿐이니까. 40살, 50살이 되어 지금의 나를 돌아보면 ‘그 때 왜 그렇게 팍팍하게 살았니. 그 돈 몇백 몇천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닌데’ 라고 할 것 같으니까. 성취하는 경험이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나를 너그럽게 풀어주기로 했다. 내년에는 아마 돌머리를 두드리며 공부를 하고 있을 텐데, 리포트며 소논문이며 쓰기도 많이 쓸 테고 발표도 많이 할 텐데, 지금 뭐 좀 안 하고 있다고 뭘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인가.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인생에서 얼마나 된다고. 쉴 수 있을 때에도 왜 온전히 쉬지를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나는 사실 ‘사는 게 재밌다’는 생각을 딱히 하지 않는 편이다. 만사를 즐겁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고 부럽다. 불교에서 말하는, 삶은 곧 고통이라는 ‘생즉고’라는 말에 오히려 공감이 간다. 일할 때도 괴롭고 백수여도 괴롭고 그 언제라도 괴로움이 가시지 않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태어났으니 살아야지.


다행히 지난 주말에 읽은 기사 하나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50년간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85세 이근후 선생을 인터뷰한 기사였다. 그는 ‘인간은 죽을 때까지 버텨야 하는 운명’이고, ‘운명 앞에서 약자인 자신의 처지를 고뇌하며 꿋꿋하게 버텨내는 게 인간다운 삶’이라고 했다. 그는 또한 ‘사소한 즐거움’에 대해 말했다.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가끔 마주하는 사소한 즐거움에 더욱 집중해봐야겠다. 밤에 한강공원을 걸을 때 맡은 달큰한 풀냄새, 길에서 들은 풀벌레 소리 같은 것에 대해. 식당에서 나는 튀김우동을 시키고 그는 회냉면을 시켰는데, 음식이 나온 뒤 내가 우동 위의 새우튀김을 혼자 날름 집어먹을 때 회냉면의 양념을 풀어 섞더니 그 첫 입을 내게 준 세젤잘의 다정함 같은 것에 대해.



* 2019년 8월 <낯선글쓰기>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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