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탈자와의 전쟁,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온 가족의 사랑을 받는 작은 블루베리 나무를 건드린 죄로 약탈자는 가족의 적이 되었다. 아빠가 적에 대한 복수를 선포하자 미취학 아동 둘은 열광했고, 아이들의 등쌀에 밀린 엄마는 별수 없이 동참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덫에 걸린 새 한 마리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모두들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새를 잡은 다음엔 어떡할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려고.”
이 무슨 간결한 답인가. 원래 복수란 이런 것이었다. 오직 적에 대한 처절한 응징. 목적과 결과보다는 분노만 앞서는 것이다. 어쩐지 약탈자 새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하기 위해 지치고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아빠의 작전은 이러했다. 새는 베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꽃을 마저 따먹으러 올 것이다. 베리 옆에 새 덫을 설치하고 미끼로 블루베리 몇 알을 올려놓으면, 녀석은 절대 유혹은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해외직구로 구입한 새 덫이 도착했다.(새 덫 구입 비용으로 블루베리를 사서 먹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는 아이들을 멀찍이 물려놓고 새 덫이 잘 작동하는지 시험했다. 덫은 생각보다 직관적이었는데, 가운데 고정핀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순간 덫이 작동하는 것이다. 새는 꼼짝없이 여기 잡히고 말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말, 우리는 작전을 실행키로 했다.
D-day, 복수의 날이 밝았다. 주말이면 항상 가장 늦게 일어나는 아빠였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서슬퍼런 복수의 덫이 약탈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베리 화분을 곁으로 밀어놓고 바로 옆에 새 덫을 설치했다. 한가운데는 그저께 사온 오동통한 칠레산 블루베리 세 알을 올려놓았다. 작업은 금방 끝이 났다. 우리는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곤 기약도 없는 잠복이 시작됐다. 비 오늘 주말. 가족은 긴장하고 있었고 덫에 걸린 새의 당황한 낯을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항상 조용한 아침이면 주변을 배회하던 녀석이 그날따라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와서 일까. 어쩌면 멀찍이 숨어서 못 보던 물건의 등장을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녀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고, 남편도 아이들도 새 덫을 살피는데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찾아 하고 있었고 나도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지만, 낮게 깔린 긴장감이 온 집안을 휘감고 있었다. 모두들 베란다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 베란다 창고에 가던 내 눈에 익숙한 검회색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블루베리 나무 쪽이었다. 평소에도 짧은 스포츠머리에 무스를(왁스 아니다) 잔뜩 바른 듯한 뻗친 머리털이, 그날따라 비를 맞아 더 날카롭게 뻗쳐 있었다. 녀석은 덫 가장자리 바깥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덫과 미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새 대가리 랬나. 나는 짐짓 신중한 녀석의 태도가 놀라웠다. 아무래도 꽃보다는 열매가 좋을 터인데, 녀석은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을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열매를 지켜봤다. 블라인드 틈새로 몰래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쩌면 녀석은 벌써 사람을 의식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새가 왔음을 알렸다.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 뒤 가족이 함께 현장으로 나갔다. 새 덫은 그대로였다. 새도 없었다. 다만 미끼로 올려놓았던 블루베리 세 알만이 사라져 있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녀석이었다. 새 덫을 움직이는 고정핀은 아주 민감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닫힐 터였다. 녀석은 어떻게 블루베리만 빼먹을 수 있었던 걸까.
“우와~ 대~단하다 진짜.”
“새 안 잡혔어?”
“응, 블루베리만 먹었어.”
기가 찬 아빠의 탄식이 터졌고, 뒤이어 아이들의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아빠가 아니었다. 남편은 블루베리 다섯 알을 다시 가져와서 이번에는 고정핀에 바짝 붙여 신중하게 미끼를 올려놓았다.
다시 몇 시간이 흘렀다. 덫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블루베리만 사라져 있었다. 설상가상, 이번에는 몇 송이 남지 않은 베리의 나머지 꽃들도 따먹어 버렸다. 홀연히 사라진 약탈자에게 모두들 바짝 약이 올랐다. 이쯤 되니 누가 누구를 혼내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마지막으로 덫에 블루베리를 올려놓았지만, 배가 부른 새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밤, 남편은 새 덫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끼로 올려두었던 블루베리는 새가 편하게 와서 먹을 수 있게 그냥 올려두었다.
꽃을 잃은 작은 블루베리 나무와 불타오르다 그대로 휘발되어 버린 가족의 분노, 그리고 새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열심히 먹이활동을 하는 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가족들은 그때마다 매서운 눈으로 새를 쏘아봤다. 온 가족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새는 여전히 낭창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다시 일 년. 베리의 가지에 또다시 새 순이 돋는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올 해는 다를 것이다.
-2021년, 초 봄, 그리고 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