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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r 15. 2022

베리 이야기 4

약탈자와의 전쟁,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

  온 가족의 사랑을 받는 작은 블루베리 나무를 건드린 죄로 약탈자는 가족의 적이 되었다. 아빠가 적에 대한 복수를 선포하자 미취학 아동 둘은 열광했고, 아이들의 등쌀에 밀린 엄마는 별수 없이 동참하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덫에 걸린 새 한 마리를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모두들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나는 슬며시 남편에게 물었다.       


  “그런데... 새를 잡은 다음엔 어떡할 거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려고.”    

 

  이 무슨 간결한 답인가. 원래 복수란 이런 것이었다. 오직 적에 대한 처절한 응징. 목적과 결과보다는 분노만 앞서는 것이다. 어쩐지 약탈자 새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하기 위해 지치고 힘든 싸움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아빠의 작전은 이러했다. 새는 베리에게 얼마 남지 않은 꽃을 마저 따먹으러 올 것이다. 베리 옆에 새 덫을 설치하고 미끼로 블루베리 몇 알을 올려놓으면, 녀석은 절대 유혹은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해외직구로 구입한 새 덫이 도착했다.(새 덫 구입 비용으로 블루베리를 사서 먹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지만, 말하지 않기로 했다.) 아빠는 아이들을 멀찍이 물려놓고 새 덫이 잘 작동하는지 시험했다. 덫은 생각보다 직관적이었는데, 가운데 고정핀을 살짝 건드리기만 하면 순간 덫이 작동하는 것이다. 새는 꼼짝없이 여기 잡히고 말 것이다. 우리는 다가오는 주말, 우리는 작전을 실행키로 했다.     






  D-day, 복수의 날이 밝았다. 주말이면 항상 가장 늦게 일어나는 아빠였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서슬퍼런 복수의 덫이 약탈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슬부슬 봄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아빠는 조심스럽게 베리 화분을 곁으로 밀어놓고 바로 옆에 새 덫을 설치했다. 한가운데는 그저께 사온 오동통한 칠레산 블루베리 세 알을 올려놓았다. 작업은 금방 끝이 났다. 우리는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그리곤 기약도 없는 잠복이 시작됐다. 비 오늘 주말. 가족은 긴장하고 있었고 덫에 걸린 새의 당황한 낯을 보고야 말겠다는 집념에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항상 조용한 아침이면 주변을 배회하던 녀석이 그날따라 나타나지 않았다. 비가 와서 일까. 어쩌면 멀찍이 숨어서 못 보던 물건의 등장을 의아하게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녀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오전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고, 남편도 아이들도 새 덫을 살피는데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각자 자기 할 일을 찾아 하고 있었고 나도 밀린 집안일을 하고 있었지만, 낮게 깔린 긴장감이 온 집안을 휘감고 있었다. 모두들 베란다에서 푸드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마침, 베란다 창고에 가던 내 눈에 익숙한 검회색 새 한 마리가 들어왔다. 블루베리 나무 쪽이었다. 평소에도 짧은 스포츠머리에 무스를(왁스 아니다) 잔뜩 바른 듯한 뻗친 머리털이, 그날따라 비를 맞아 더 날카롭게 뻗쳐 있었다. 녀석은 덫 가장자리 바깥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덫과 미끼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가 새 대가리 랬나. 나는 짐짓 신중한 녀석의 태도가 놀라웠다. 아무래도 꽃보다는 열매가 좋을 터인데, 녀석은 절대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녀석을 비를 맞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열매를 지켜봤다. 블라인드 틈새로 몰래 지켜보고 있었지만 어쩌면 녀석은 벌써 사람을 의식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는 잠시 자리를 비우기로 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새가 왔음을 알렸다. 

쓸데없이 예쁘게 나온 약탈자 녀석. 녀석의 이름은 직박구리다.(출저: 블로그, 수 사진이야기)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조금 뒤 가족이 함께 현장으로 나갔다. 새 덫은 그대로였다. 새도 없었다. 다만 미끼로 올려놓았던 블루베리 세 알만이 사라져 있었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녀석이었다. 새 덫을 움직이는 고정핀은 아주 민감해서 조금만 움직여도 금방 닫힐 터였다. 녀석은 어떻게 블루베리만 빼먹을 수 있었던 걸까.     


  “우와~ 대~단하다 진짜.”

  “새 안 잡혔어?”

  “응, 블루베리만 먹었어.”


  기가 찬 아빠의 탄식이 터졌고, 뒤이어 아이들의 아쉬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아빠가 아니었다. 남편은 블루베리 다섯 알을 다시 가져와서 이번에는 고정핀에 바짝 붙여 신중하게 미끼를 올려놓았다.      


  다시 몇 시간이 흘렀다. 덫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블루베리만 사라져 있었다. 설상가상, 이번에는 몇 송이 남지 않은 베리의 나머지 꽃들도 따먹어 버렸다. 홀연히 사라진 약탈자에게 모두들 바짝 약이 올랐다. 이쯤 되니 누가 누구를 혼내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했다.      


  그날 저녁, 남편은 마지막으로 덫에 블루베리를 올려놓았지만, 배가 부른 새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늦은 밤, 남편은 새 덫을 거두었다. 그리고 미끼로 올려두었던 블루베리는 새가 편하게 와서 먹을 수 있게 그냥 올려두었다.     






  꽃을 잃은 작은 블루베리 나무와 불타오르다 그대로 휘발되어 버린 가족의 분노, 그리고 새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났다. 우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열심히 먹이활동을 하는 새의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가족들은 그때마다 매서운 눈으로 새를 쏘아봤다. 온 가족의 분노와는 상관없이, 새는 여전히 낭창한 표정으로 살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일이 있고 다시 일 년. 베리의 가지에 또다시 새 순이 돋는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올 해는 다를 것이다. 



                                                                                                       -2021년, 초 봄, 그리고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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