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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r 14. 2022

베리 이야기 3

약탈자의 습격

  성공적인 첫 수확이 끝나고 베리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거추장스러운 방조망도 걷어냈다. 이제는 그저 햇빛과 충분한 물을 즐기면 될 터였다. 녹음이 짙어지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베리의 잎도 고운 단풍이 들었다. 추운 겨울이 오고 잎이 떨어졌다. 푸르고 풍성했던 가지가 언제 그랬냐는 듯 앙상하게 변했다. 한 겨울 동안은 집안에서 지냈다. 낮 시간 동안은 베란다 창문으로 햇볕을 쏘였다. 다시 돌아올 봄을 기다리며.   

  

  2월 말. 공기에 훈기가 느껴지는 가 싶더니 가지 끝에 새 순이 돋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베리는 죽은 듯 조용한가 했더니 어느새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식물의 생명력이란 참으로 신기한 것이었다. 집안에서만 지내도 때가 되면 싹의 틔우니 말이다. 베리는 몇 달 만에 다시 바깥으로 나갔다. 이른 봄바람에 홀로 서 있는 블루베리 나무는 새로운 큰 가지를 뻗어내고 있었다. 가지 하나가 나왔을 뿐인데, 작년에 비해 한 뼘은 더 큰 것만 같았다. 우리 집에서 맞이한 4년생 나무의 두 번째 봄이었다. 베리는 햇볕의 온기를 받으며 슬며시 새 순을 내어 놓았다. 아이들과 엄마는 올해도 잘 부탁한다며 인사를 건넸다.

      

  베리는 봄을 만끽했다. 이파리는 커졌고 순에는 작은 꽃 봉오리가 맺혔다. 아직 꽃을 피우지도 않았는데 부지런한 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오리가 터졌다. 딱 1년 전 만난 연둣빛이 옅게 도는 뽀얀 아이보리 꽃이 올망졸망 피어났다. 작은 종 모양의 꽃들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작고 여리고 소복한 꽃은 햇볕에 반짝였다. 이 순간만큼은 화단의 백목련이 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베리를 찾는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새로 난 가지까지, 작년보다 많은 블루베리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었다.      




  며칠 뒤, 언제나처럼 유치원에 다녀온 아들은 제일 먼저 베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는 의아해하며 말을 꺼냈다. 

     

  “엄마, 베리 꽃이 떨어졌어.”

  “꽃이 떨어졌어?”

  “엉, 몇 송이 떨어져 있어.”     


  아들의 말을 듣고는 베리에게 갔다. 정말 화분에 핀지 얼마 되지 않은 꽃들이 떨어져 있었다. 이상한데. 벌써 지기에는 아직 꽃이 한창이었다. 아직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니 아마도 그 때문이리라.      


  “별일 아닐 거야. 어제 바람이 쎄게 불어서 떨어졌나 봐. 베리도 날씨를 이겨내야 튼튼한 나무가 될 수 있으니 좀 더 지켜보자.”      


  다시 며칠이 지났다. 퇴근 후 장을 본 뒤, 아이들과 집에 들어오는 길에 집 근처에서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짙은 회색 새 한 마리를 봤다. 흠... 아니겠지? 설마 열매도 없는데 벌써 그럴 리가. 진실을 깨달은 건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또 며칠 뒤, 나는 내 눈으로 목격하고야 말았다. 나뭇가지에 낭창히 앉아 블루베리 꽃을 맛나게도 따먹는 눈에 익은 양아치 녀석 한 마리를. 약탈자다! 순간 머릿속에 떨어진 꽃잎들이 스치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랴부랴 손에 들고 있는 겉옷을 힘껏 휘둘러 새를 쫓아내고는, 서둘러 집에 들어가 베리를 확인했다. 이 자식. 꽃을 거의 다 따먹고 몇 송이 남겨놓지 않았다. 생각도 못했다. 열매가 맺히지도 않은 꽃을 따먹을 줄은. 머릿속이 새 하얘지며 갖은 의문이 들었다.      


  ‘열매 익은 냄새도 안 나는데 꽃을 따먹어? 그보다 저 녀석, 작년 그 녀석인 건가? 설마 새가 블루베리 나무를 기억하고 다시 돌아 온건가? 새 대가리라며. 그게 가능한 거야?’   

  

  비극적인 소식은 곧 가족들에게도 알려졌다. 회사에 있던 아빠는 경악했고, 유치원에서 돌아온 남매는 몹시도 분개했다. 집안에는 소복이 꽃 이불을 덮은 채, 가지 끝에 몇 송이의 꽃을 대롱대롱 달고 있는 초라한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소환돼 있었다. 저녁이 되자 쉬이 사그라들지 않는 분을 애써 삭히며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아빠가 말을 시작했다.   


  “도저히 못 참겠다. 새 한 마리 때문에 올해 블루베리 농사는 망했어.”

  “이제 블루베리 안 나는 거야?”

 

 딸은 이제야 상황이 정확하게 파악이 됐다.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순 없어. 본 때를 보여줘야 두 번 다시 안 오지. 그 새는 베리를 건드린 벌을 받아야 해!”  

   

 그리곤 아빠는 핸드폰을 꺼내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의 사진을 보여줬다.                

새 덫. 가운데 아슬아슬한 핀을 건드리면 덫이 닫힌다.


  “아빠 이게 뭔데?”

  “새 덫이야. 새 잡는 거.”     


  단단히 화가 난 아빠는 회사에서 퇴근하기도 전에 새 덫을 주문해 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해외직구 씩이나 해서. 아빠의 복수 계획에 아이들은 열광했다.     


  “우와! 아빠 대박! 새 잡자! 혼을 내주자!!”

  “아빠, 우리 새 잡아서 치킨 해 먹자!!”

  “야, 그건 닭이지~!”     


  남매는 흥분했고, 아빠는 으쓱해했다. 엄마는 눈에서 광채를 뿜으며 새 덫의 작동원리를 설명하는 아빠와 새삼 놀라운 집중력으로 아빠의 설명을 듣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아, 사람이 이렇게 선동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뭘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말리기엔 이미 늦은 것 같기도 하고, 일이 어떻게 진행 될지 궁금하기도 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2021년, 초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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