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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Mar 13. 2022

베리 이야기 2

약탈자의 등장, 그리고 첫 수확

 우리 집 블루베리 나무는 조생종이다. 조생종은 과일 수확시기가 이른 편인데, 올 때부터 조롱조롱 예쁜 꽃이 한 아름 피어있던 베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꽃받침 아래에 예쁜 열매를 맺었다. 농원 사장님의 말에 따르면 6월 초에는 수확이 가능할 것이었다. 그즈음 우리 가족들은 누구 하나랄 것 없이 베리에게 푹 빠져있었는데, 매일 아침 베리가 간 밤에 안녕했는지를 살피며 하루를 시작했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모두들 베란다 창문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밤 사이 열매가 몇 개나 더 맺혔는지, 흙은 마르지 않았는지, 벌과 나비는 많이 오는지. 예비 농사꾼 아들은 뒷다리 가득 꽃가루를 묻히고 이 꽃, 저 꽃을 바삐 오가는 벌들을 깊이 관찰했는데, 꽃 안에 머리를 들이밀고는 열심히 씰룩이는 벌 엉덩이를 보며 특히나 즐거워했다. 아이들은 처음으로 당연했던 모든 것들에 감사해했다. 반짝이는 햇빛도, 머리를 흩트리는 바람도, 근처에 오면 무서워 도망가기 바빴던 벌들도. 모두가 베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날씨가 조금씩 더워졌다. 베리의 꽃도 거의 다 말라 떨어졌다. 조그마한 초록 열매들이 조금씩 통통하게 살이 올라 제법 블루베리의 형체를 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벌써 불그스름한 보랏빛을 띠는 것도 보였다. 한 번에 다 따면 시장에서 파는 100g짜리 블루베리 통 하나를 채우고 조금 남을 정도의 양이었다. 기다림은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여졌다. 화분에 거의 다 익어가는 보라색 열매 몇 개가 떨어져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가장 높은 곳에 달려있던 블루베리 일부가 여기저기 날카로운 것에 쪼인 듯 파여 있었다. 이런, 약탈자가 나타났다. 뒤늦게 방조망을 덮어 씌웠고, 머지않아 현장에서 유력한 용의자를 발견했다. 비둘기보다 날씬한 체형의 양아치(?) 스러운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는 검회색 새 한 마리가 주변 나뭇가지에 낭창히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약탈자는 자신을 노려보는 여섯 개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모르는지, 짐짓 딴청을 부리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현장을 잡기 위해 매복이 시작됐다. 창문을 닫고 블라인드를 내린 뒤 창 틈으로 보이는 새를 노려보고 있으니 곧 새가 행동을 시작했다. 범행이 시작된 것이다. 아들은 급히 창문을 열어 “저리 가!!”하며 외쳤고, 약탈자는 화들짝 놀라며 날개를 퍼덕이며 현장을 떠났다.      


  그날 저녁, 가족회의가 열렸다. 현장을 직접 목격한 남매는 흥분하며 잔뜩 붉어진 얼굴로 아빠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모든 상황을 정리한 아빠는 방조망 보완계획을 세웠고, 가족은 각자 장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케이블 타이와 튼튼한 농업용 지지대를 사러 간 사이, 아이들은 아빠의 공구상자와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어린이용 무지개 우산을 꺼내왔다. 그리고는 집안으로 긴급 소환된 베리 앞으로 모였다. 아빠는 솜씨 좋게 지지대를 새웠다. 화분 한가운데 스테인리스 재질의 길고 단단한 기둥이 박혔고 그 끝에 딸의 무지개 우산이 단단히 묶였다. 약탈자의 부리가 닿지 않게 여러 높이의 지지대를 부채꼴로 둘러 설치하고 방조망을 우산 끝에서부터 덮어 씌워 거대한 방어막을 만들었다. 정비를 마치고 나니 50cm 크기의 자그마한 나무가 별스럽고 요란하게 치장 한 꼬마 피에로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동네 주민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화려함이 우리 가족의 열의(혹은 광기?)를 대변할 것이었다. 이쯤 하면 안심이다. 베리는 요란한 몸치장을 뽐내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고,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의 조류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이따금 약탈자가 주변을 맴돌긴 했지만 무지개 우산의 기세에 눌려 쉽게 범행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새는 익숙한 가지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떠나가길 반복했고, 가족들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첫 수확이 시작됐다. 매일 아이들의 작은 고사리 손 한 줌을 채울 정도의 블루베리를 수확했다. 앉은자리에서 블루베리 1kg쯤은 너끈히 먹을 남매였지만 직접 수확한 블루베리 한 줌의 소박함이 아이들을 행복하게 했다. 아이들은 몇 알의 블루베리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어 입안 여기저기를 굴려가며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첫 수확은 성공적이었고, 블루베리는 맛있었고, 약탈자는 잊혀졌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녀석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2020년, 늦봄에서 초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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