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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Aug 22. 2022

'착한 아이'는 누가 규정하는가.

  나른한 일요일 오후. 둘째의 공주 동화 읽기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 골라온 책은 디즈니 공주시리즈 고전 중의 고전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되시겠다. 디즈니 공주시리즈의 시대착오적 여성상과 '왕자와의 결혼=영원한 행복' 공식이 어린 여아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떤 것이던가. 엄마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인생 최대 목표가 '공주'가 되는 것인 여섯 살 여아에게 '공주'라는 브랜드 파워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썩 달갑지 않으나, 오늘도 읽어준다. 공주 동화.


왕은 공주의 탄생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잔치를 열었어요.  
이웃나라의 왕과 왕자도 찾아왔지요.   
두 나라 왕은 오로라 공주가 자라면 왕자와 결혼을 시키자고 굳게 약속했어요.
    -디즈니 프린세스 시리즈, 「잠자는 숲 속의 공주」 중


  읽을 때마다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강보에 쌓인 갓난아이를 두고 왜 아버지들끼리 혼담을 주고받는단 말인가. 쓸데없이 동화 한 구절에 부아가 치밀어 오른 나는, 이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기 위해 무릎 위의 딸에게 질문을 했다.  


  "나중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좋아, 아니면 얼굴도 못 봤는데 엄마 아빠가 정해준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좋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

  "그렇지? 그런데 왜 아빠들끼리 약속하는 거지? 아들, 넌 어떻게 생각해?"


  옆에서 턱을 괴고 심드렁하게 소파에 기대어 '시시하게 공주 동화 따위'라는 표정으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아들에게 공을 넘겼다.


  "나?"

  "어, 넌 네가 선택한 사람이 좋아, 엄마 아빠가 정해준 사람이 좋아?"

  "난 엄마 아빠가 정해준 사람"


  뭐라??!!!!   


  나는 침착하게 다시 아들에게 물었다..


  "왜? 왜 엄마 아빠가 정해준 사람이랑 결혼하려는 거야?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모르고, 나랑 맞는지 안 맞는지도 모르는데??"  (당황해서 말이 길어졌다...)

  "그거야... 엄마 아빠 말 잘 들어야 착한 아이니깐. 당연한 거 아니야?"


  맙소사......!!!



  나는 아이를 양육하는 어른이 아이에게 행하는 무의식적 가스라이팅의 최고봉은, 단연 '착한 아이'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이를 키우며 단 한 번도 '착한 아이'라는 칭찬을 한 적이 없다. 대신 '좋은 생각을 했구나, 애를 썼구나, 기특하다, 자랑스럽다.'는 우회적인 칭찬을 하고자 노력했다. '착함'의 의미를 부모를 비롯한 '타인에 대한 인정'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발적 선행' 임을 깨우치기 전까지 함부로 '착한 아이'로 키우지 않으려 했다. 그렇게 키운 아들의 입에서 이 단어를 듣게 될 줄이야...!






  '착하다'는 것은 누구에 의해서 정의되는가.

  경우에 따라 다르겠으나 행위 주체자가 들어서 달가운 말은 아니란 건 분명하다. 취지와 의미가 어떻든 착하다는 칭찬은 상대와 나를 동격의 선상에서 보고 있지 않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해야 착한 어린이지.'라는 압묵적 통제나, '착한 아이구나.'와 같은 행위 보상적(행위자의 의도와는 무관한) 칭찬에는 존중과 배려가 결핍되어 있다. '착하지~~ 이리온~~'하는 건 어쩐지 강아지 훈련에 더 어울리는 말이지 않은가.


  지인 중에 '내가 호구인가 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이가 있었다. 사람도 좋고 선하며 타인들에게 항상 호의를 베푸는 이였다. 그의 고민은 자기의 다정함을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긴다는 점에 있었다. 친절이 반복되니, 호의를 권리로 알고 때론 희생을 요구하는 등의 무리한 요구도 거리낌 없이 해 온다는 것이다. 그는 무리한 요구를 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를 들어주고 뒤돌아서 허탈해했다. 그는 자신을 '호구'라 칭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내가 생각하기에, 선(善)한 행위라는 것은 '자발적'이라는 것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자발적 선(善)'은 행위자 본인의 자기 충족과, 타인의 내키지 않는 '강요'에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선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하는 선함에는 Give&Take가 불필요하다. 행위의 목적은 타인에게 있지 않다.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나의 기쁨에 기여하기 위한 행위이기에, 선한 행위의 결과로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받게 되리란 기대가 없다.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요구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은 주체적인 관계 맺음에 효과적이다. '착함'은 규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다. 나의 친절은 당신의 인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친절하지만 단호히 거절할 수 있는 관계의 자신감은 이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착함'은 타인으로부터가 아닌, 스스로가 규정한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착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스스로를 보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투철한 시민의식과 도덕적 인식과 행동,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는 삶, 가까운 이웃을 돌보는 다정함과 같은 것은 누가 알던 말건 아무런 상관이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행동하며 스스로 충만해지면 그뿐. 단언컨대, 작은 선한 행위의 축적은 '나를 보다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게 분명하다. 그리고 '자존감'이란 이렇게 완성되어 지는 것이다.






  나는 다시 아들에게 물었다.


  "착한 아이.. 중요하지. 덕분에 엄마 아빠가 편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 그런데 아들, 언제까지 착한 아이 할 거야~?"

  "... 모르겠는데?"

  "엄마 생각엔, 엄마 아빠나 선생님, 친구들을 위해서만 착하게 살면, 네가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 착한 건 그냥 네가 착하고 싶을 때 착하면 돼. 그리고 착한 행동을 해서 '기쁘다'는 게 어떤 건지 느껴보면 돼."

  "....."


  아들은 굉장히 어려운 이야기를 들은 표정이었다. 그리곤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다른 놀이를 하러 자리를 떠났다. 아마도 아들이 가진 좁은 세계에는 이해하기 조금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알게 되길 바란다. 나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드는 것은 이기심과 냉정이 아니라, 자발적 선(善)의 성취와 감정의 공유, 자신에 대한 만족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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