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Sep 10. 2022

연휴 첫날의 풍경

  '아기다리 고기다리'가 찾고 싶어 지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추석 연휴가 시작됐습니다.

 

  복직이 채 열흘이 안된 것 같은데, 어쩜 이리도 혼돈의 도가니 같은 나날의 연속일까요. 평일 내내 퇴근시간을 놓친 덕분에 각자도생 중인 여덟 살, 여섯 살 남매에게도 혼란스러운 시간들이었어요. 첫째는 엄마가 미리 맞춰 놓은 알람 소리를 못 들어 수영장 셔틀버스를 놓쳤고요, 둘째는 요일을 착각해 학원 마치는 시간을 잊어버린 엄마 덕에 수업이 끝나고도 40분이 넘게 학원에서 기다리기도 했어요. 다행히 첫째는 할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해 할아버지가 차로 수영장에 데려다주셨고요, 둘째는 이때다 싶어 선생님이 태블릿으로 틀어준 만화영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더군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을 텐데, 이럴 때는 약간 둔한 기질을 가진 아이들이 어찌나 다행인 줄 모릅니다. 늦게서야 부랴부랴 나타난 엄마를 탓하지도 않고, 알아서들 잘 있어준 두 아이가 얼마나 고마운지요.


  괜히 미안한 마음에 평소에 잘 사주지 않던 간식거리도 덥석 사주게 됩니다. 자그마한 손에 간식거리를 쥐어주는 엄마의 손이 참 부끄럽습니다. 고사리 손에는 간식거리 대신 엄마의 손가락이 들어있어야 할 텐데요. 엄마의 마음이야 어떻든, 아이는 당장 손 안의 젤리 한 봉지가 마냥 좋은가 봅니다. 


  연휴 첫날 아침부터 냉장고 파먹기를 했어요. 사흘 전 먹고 남긴 짜장과 이틀 전 둘째 아이 생일날 끓인 미역국이 남아있군요. 후딱 밥은 안치고 두 가지 음식을 데웁니다. 명절이 무색한 아침밥입니다만, 명절이 무슨 대순 가요. 당장 아이들에게 따끈한 아침밥을 먹이는 게 더 중요하죠. 생각해보니 명절에 전 안부치는 며느리라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명절이라 딱히 왕래할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은 집 막내며느리에 윗 동서는 외국인, 거기다 제사에 직접 관여치 않으시는 시어머니를 모신 것도 복이라면 복이지요. 가족문화가 이렇다 보니 지척에 계시는 양가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 이외에는 별 다른 계획이 없기도 합니다. 덕분에 조금 삭막하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만, 당장 몸이 편하니 하게 되는 사치 비슷한 거라 여깁니다. 


  아침상을 치우는 뒤통수에 아이들의 '엄마~' 소리가 들리네요. 심심하단 소립니다. 커피 한잔을 들고 아이들에게 갑니다. 소파 위에 며칠째 쌓아둔 책들이 보이네요. 자기 전에 읽어달라 청했는데 제가 꾸벅꾸벅 졸아서 못 읽어준 책들이에요. 쌓인 책이 아이들의 항의 같아 뜨끔합니다. 남매를 불러 책을 읽어주려니 아들이 말해요.


  "엄마!! 보드 게임하자. 엄마랑 보드 게임할래!!"

  "그래, 그러자. 뭐 할까?"

  "블록 집짓기!"

  "아니야~ 콩 게임할 거야!!"

  

  남매의 투닥거림이 끝이 나지 않아요. 사실 아이들이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슬쩍 핸드폰으로 브런치에 밀린 피드를 읽고 싶었는데요, 그럴 틈도 없이 아들이 극적 타결을 이뤄냅니다. 


  "좋아, 네가 좋아하는 블록 집짓기 하고, 콩 게임하자! 대신 두 판만 하기다!"

  "응! 좋아!"


  제법이네요. 알아서 타협을 이끌어 낼 줄도 알고요. 아니, 그보다 동생과 투닥거릴 시간에 엄마랑 조금이라도 더 놀고 싶었던걸 지도 모르겠어요. 평일 저녁에는 밥 먹고, 공부를 봐주는 것 말고는 엄마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까요. 


  두 아이는 합심해서 엄마를 이겨보겠노라 호언장담을 해요. 아이들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줍니다. 남매 둘이 엄마를 상대로 전략까지 짜니 진심으로 응해줘야지요. 

도전! 노란색(엄마)을 덮어라!



  두 녀석이 동시에 죽자고(?) 덤벼드니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엄마 꼴찌! 엄마를 기어이 꺾더니 둘은 하이파이브를 치고 만세를 부르고 난리네요. 단결되는 남매가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기엔 엄마가 그리 만만치 않죠. 2차전 콩 게임에선 설욕을 해야 하니까요. 콩 게임에서도 두 녀석의 연합작전이 계속되는군요. 엄마만 빼고 서로 카드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볼만합니다. 아무래도 투닥거리는 것보단 우애가 깊은 게 보기에는 더 좋죠. 하지만 이번엔 엄마도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가뿐하게 이겨줬지요. 


  아이들의 외할머니와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아이들과 1시간 거리에 있는 할머니 시골집에 놀러를 갔어요. 지난봄에 심어둔 고구마를 수확할 때가 되었군요. 긴 바지에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호미를 들고 뒷밭으로 갑니다. 한때 농부가 꿈이었던 여덟 살 현이는 능숙하게 호미를 들어요. 할머니와 함께 처음엔 야무지게, 나중엔 흙을 살살 걷어내며 조심스럽게 고구마를 캐내는 모습이 제법 그럴싸해요. 풀이 무성히 자란 텃밭에 모기가 달려들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에 엄마만 종종거리며 모기기피제를 여기저기 뿌립니다. 모기가 너무 많아 반 고랑 정도만 캐고 중단했어요. 그래도 제법 양이되는군요. 

  

갓 캔 고구마



  내일은 아들이 캔 고구마로 고구마 전을 부쳐먹어야겠습니다. 기분은 안 나지만 명절은 명절이니까요. 어쩐지 기름 냄새가 나지 않는 날은 명절이 아닌 것만 같습니다. 못생긴 녀석들은 뭉텅뭉텅 잘라 고구마 맛탕도 해야겠어요. 달달한 고구마 냄새가 벌써부터 코 끝을 간지럽힙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휘영청 밝은 달에 토끼 한 마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입니다. 한가위, 맞네요. 

  연휴의 시작이 좋습니다. 간만에 늦은 밤 글도 쓰고요. 

  저는 비록 무료한 듯 심심하게 보내고 있지만, 안 그러신 분들도 많으시겠지요?

  모두에게 풍요롭고 평화로운 명절이 되셨음 합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아.. 글 쓰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