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움 Jun 21. 2022

그림자 응시하기

  원형(archetypes)은 내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형태만 가지고 있다. 성격과 행동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5가지 원형 가운데 페르소나(persona)와 그림자(shadow), 자기(Self)가 있다.

 - 페르소나(presona)는 라틴어로 '가면'이라는 뜻이며 개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페르소나는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 사고, 행동을 조절해야 하는 것을 배우는 데 유용하다. 그러나 페르소나를 너무 중요하게 여기면, 개인은 진정한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삶을 살게 될 뿐만 아니라 순수한 감정을 경험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림자(shadow)는 자아의 어두운 부분, 즉 의식되지 않는 자아의 분신이다. 그림자는 개인이 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성적이고 동물적이며 공격적인 충동을 포함하고 있다. 자아가 그림자를 받아들여 화목하게 영혼 속에 편입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가 심리적 건강에 매우 중요하다. 치료 목표는 그림자를 의식으로 가져와 인식하고 표현하도록 돕는 것이다.

- 자기(Self)는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한 성격 전체의 중심이다. 자아(ego)가 의식의 중심이라면, 자기(Self)는 성격 전체의 중심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성격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출처: 현대 심리치료와 상담이론(권석만 저, 학지사) 중
    Carl Gustav Jung,  분석적 심리치료(analytical psychotherapy) 발췌
*출처: https://blog.naver.com/lucenty01/221567620404


  영혼의 지도에는 외부세계의 페르소나(persona), 내부 세계의 그림자(shadow), 가운데 자기(Self)가 존재한다. 무의식의 그림자는 의식의 페르소나와 통합, 분열을 반복하는데,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자기(Self)다. 자기는 외부세계의 자아(ego)와의 관계를 통해 성격 구조에 대한 의식을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삶에 대한 이해와 진정한 의미의 '개성화'를 구축하게 되는데, 이때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함몰되거나 그림자에만 침식되어 있으면 건강한 자기 성장을 이루기 어렵다. 진정한 자기의 발현인 '개성화'는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괴리가 아닌 전체성과 통일성으로만 가능하다. 개인의 성장은 흑과 백의 분절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영혼의 빛이 흑이나 백이 아닌 '회색'임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의미의 성장을 이룩할 수 있다.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적 심리치료에서는 그림자에 잠재된 콤플레스의 의식적 편입을 중요하게 다룬다. 외부세계와 맞닿은 페르소나는 의식적 자아다. 반면 내부 세계에 잠재되어 있는 그림자는 의식되지 않는 자아의 분신이다. 분석적 심리치료에서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종국에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려 불안과 긴장에서 벗어나 적절한 방법으로 외부로 발산함으로써 개인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둔다. 결국, 의식과 무의식의 가교 역할을 하는 자기(Self)의 실현이 인간 삶에 있어서 궁극적 목표이다.  






  A는 항상 스스로를 '서구적 마인드'의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라 자평했다. 일찍이 유학길에 올라 현지에서 대학을 다니며 이민자로의 정착을 꾀하였으나, 예상치 못한 이민자 정책 변화로 목표를 달성치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의 공동체 주의와 획일주의, 교육문제, 젠더 갈등에 대한 비판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서구문화의 장점을 높이 평했다. '개방적'이라는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여느 80년대 아버지상과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점과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 유학했던 나라에 대한 좋은 인상을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특이점이라 할 만큼 아이러니하다.


 과거 이력으로 보나, 가치관으로 보나, 나와 여러모로 충돌되는 지점이 많기는 하지만, 특히나 나를 자극하는 부분은 특유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다. 올드한 감성을 넘어 상대를 살짝 내려보는 듯한 뉘앙스의 말이 귀에 내리 꽂힐 때면, 정말 계급장 떼고 들이받아 버릴까 하는 생각에 수십수백 번 고민을 하게된다. 매번 대화로 시작해 투쟁으로 끝나는 만남 뒤엔 미처 내뱉지 못한(내뱉어서는 안 될) 울분의 잔열에 속이 쓰려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렇다. 그는 절묘하게 숨겨진 내 그림자를 자극하는 인물이다.

 

   나는 내 그림자를 알고 있다. 그리고 적당히 페르소나에 스며들어 폭력적이지 않게 나를 드러내는데 평소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82년 김지영>이라는 소설과 영화가 나왔을 적, 내용과 별개로 파생된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가 야기한 사회적 갈등 모두에 동의하지는 않으나, 어쩔 수 없는 '김지영 세대'라는 것이 이런 장면에서 드러나고야 만다. 여성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야기한 성(性)적 콤플렉스가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점 말이다.   


  길을 가다 예쁘다며 갓 2차 성징이 시작될 나이의 여학생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치고 가는 행인.
  또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아버지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회적 분위기.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대낮 횡단보도에서 '매춘'을 들먹이던 지저분한 남자.
  여중, 여고에 어지간히 자주 나타나 나중에는 벗던 말던 별 대수롭지도 않던 바바리맨.
  대학에 오니 별시답잖은 놈들이 시답잖게 던지던, 말도 안 되는 희롱과, 수 많았던 술자리.(술을 따르라던가...)

  사회 초년생이 되고 나니, '넌 직장을 잘못 찾은 것 아니냐?(뉘앙스 상 술집에 일하는...?)' 라던가, '넌 일 잘할 생각 하지 말고 아양이나 잘 떨면 돼~' 라던가...


  (아, 오해할까 하는 말인데... 객관적인 내 외모가 뛰어나다거나, 몸매가 타고났다거나 한 것은 결단코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겠다. 지극히 평범히, 외형적 콤플렉스가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


  내가 겪은 경험이 그다지 특별한 일들은 아니다 .  비슷한 시기,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경험을 한 분들도 많을 것이다. 물론 지금으로선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일들이지만 말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그냥 속으로 욕지거리 한 번 하고는 넘겼던 일들이다. 그런데 그저 흘러 넘겨 어디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일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켜켜이 적립돼 있었나 보다. 어느 순간, 스위치가 눌렸다. 그리고 발끈! 뒤엔...






  분노와 혐오의 감정과 타인을 향한 폭력성은 궁극적으론 내면에 도달한다. 속에 담아둔 화를 실컷 뱉어내고 해소하고 나면, 뒤늦게 그림자의 범람에 무방비 상태로 당해버린 페르소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외부로의 폭력은 내부로의 폭력과 다름이 아니다. 결국, 완벽히 억압하지 못한 자기의 무능감에 무너지는 것 또한 자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림자의 '적당한' 통제는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단단히 고삐를 쥔 채, 적절히 풀어주고, 적절히 조이며, 폭발적이지 않게 드러내는 각자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범위에서 부드럽지만 분명하고, 유연하지만 단호하게 자기를 드러내는 것. 통제력의 증가는 진정한 자기를 찾아내는데 확실한 도움이 된다.  


  유사한 주제나 자극에 고통을 받는다면, 나의 부적응적 감정(폭력, 우울 등) 이면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찾아볼 필요가 있다. 나를 괴롭게 하는 상황, 사건, 대상을 가만히 살펴보고, 그들이 나의 내면에 쏘아대는 화살의 향방을 따라간다. 가장 아픈 곳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를 발견하면 가만히 응시하며,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차근차근 뜯어본다. 그리곤 '아,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 나를 그렇게 괴롭혔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림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련의 과정은 자기 수용(self-acception)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리고 진정한 자기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편안해질 준비를 할 수 있다.



  그래! 나 원래 울퉁불퉁 삐죽빼죽 못생겼어! 이게 나야!



  뭐... 이론적으론 그렇다!


  





  그래서, 나는 지금 그림자 속 분노 스위치를 지웠냐고? 진정한 자기 수용에 이르렀냐고?
  내 대답은 '아직, 아니'다.

  사실은 나를 자극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진 스스로 많이 다듬어졌다 생각했다. '많이 컸다!'며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아직 발끈하는 걸 보니 아니었나 보다. 그런 의미에서 돌려 말하자면, 잊고 있던 모난 돌멩이를 자각시켜 준 그의 존재에 고마워해야 할까?


  잊고 있나 본데... 넌 원래 이렇게 생겼어!


  하고 말이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도 다 가는데, 아직까지 화를 내고 있는 걸 보니, 나도 다시 그림자를 들여다볼 때가 됐나 보다. 부디, 못생긴 짱돌이 예뻐 보이기라도 해야 할 텐데...





* 사진 출처: Pixabay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을 찾아 나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