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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움 Jun 27. 2022

부동산 투기의 말로

강제매각, 파산, 외계인 침공, 그리고 죽음의 부루마블

  한낮의 볕이 금세 정수리를 뜨겁게 만든다. 대략 20여 년 전, 가수 비가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부른 이후로, 나는 여름만 되면 '태양을 피하고 싶었어~~'라는 노랫말을 계속 흥얼거리는 사람이 됐다. 무심결에 노래가 자동 재생되는 걸 보니 폭염이 머지않았나 보다. 평생 집순이가 될 팔자는 아니지만 요즘 같은 날, 주말이랍시고 아이 둘을 데리고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은 영 엄두가 나지 않는 관계로, 일치감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가족은 모처럼 방콕을 결심했다.


   온 가족이 에어컨 앞에 옹기종기 모여 무엇을 할지 고민을 하던 때, 아들이 나섰다.


  "모두의 마블 하자!! 모두의 마블!!"


  그렇다. 이 게임으로 말하자면, '부동산 광풍이란 무엇인가' 하는 심오한 주제를 놀이로 승화시켜 일찍이 대한민국 어린이들의 부동산 조기교육을 담당했던 '부루마블'의 최신 개정판이다. 우연히 텔레비전 광고를 보고 사달라기에 아이들과 시간도 보낼 겸, 엄마 아빠의 옛 추억도 살릴 겸 구입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처음에는 화폐 단위와 은행의 역할,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이익을 창출하는 일련의 경제 교육으로 접근했었다. 하지만, 자식은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했던가. 엄마의 교육적 의도와 달리, 아들은 게임 규칙을 익히고 머지않아 승부사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들은 초반부터 공격적으로 도시를 사들이는 과감한 플레이어였다. 동시에 부루마블 판에서는 운까지 따라주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이 작은 도시 점령군은 주사위를 던졌다 하면 더블(주사위 2개가 같은 수)이 나오고, 포춘 카드만 뒤집으면 방어와 공격카드가 나왔으며, 어렵사리 얻은 도시 하나가 전부인 아빠를 공격해서 재기불능 상태로 만든 뒤 결국 파산하게 만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승부사였던 것이다. 통행료가 엄청나게 비싼 도시를 싹쓸이하는 것으로 모자라, 축제도시와 올림픽 개최권까지 모조리 휩쓸어버리는 폭군 앞에서, 현실 엄마, 아빠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일쑤였다. 게임을 할 때마다 아들이 최종 승자로 살아남은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아들에게 통행료로 64만 원을 지급한 뒤, 고작 9만 5천 원의 통행료를 수금한 엄마의 씁쓸함이란...)


  오늘도 아들은 어김없이 돈을 긁어모으며 승부욕을 마음껏 뽐냈다. 한 다리 건너 아들 도시인데, 주사위 던지기를 망설이며 아슬아슬하게 포춘 카드 존에 정착한 아버지의 포효를 들은 적이 있는가. 하물며 '무인도 행'이 나온 것에 환호성까지 지르는 남편을 보며, 저물어가는 인생길의 배우자의 모습이 저렇지는 않기를 바라는 내 심정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랬다. 결국 남편은, 아들이 랜드마크를 세운 축제도시에 안착한 뒤, 소유한 도시를 모두 매각하고도 통행료를 내지 못해 파산에 이르고 말았다. 남편은 도시와 건물과 게임 말을 정리한 뒤, 은행장으로 보직을 옮겼다. 그리곤 이런 말을 남겼다.


  "그래도 아들이 아빠가 못 다 이룬 꿈을 이루네. 아빠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어째, 웃고 있는 얼굴이 더 슬퍼 보이는 남편이었다.


  남편의 파산으로 나는 아들과의 진검승부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일찍 떠난 남편의 복수(?)를 위해 이대로 무너질 순 없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것. 이 앞에서 엄마와 아들은 없다. 오로지 경쟁자일 뿐. 비장한 각오로 주사위를 던지며 게임의 결말을 향해 달리던 이때, 한 시간이 넘게 방에서 낮잠을 자던 딸이 깨어났다. 부스스한 얼굴로 거실에 나온 딸은 그 사이 엄마와 아빠와 오빠 사이에 있었던 투기판의 치열함은 아는지 모르는지, 자연스럽게 엄마의 다리에 털썩 주저앉아 당연한 자기 몫인 양 주사위를 대신 던지기 시작했다. 역시, 집안의 최고 상전은 막내지. 딸은 엄마와 오빠의 승부일랑 아랑곳하지 않고, 순식간에 오빠와 자기의 게임으로 게임판을 흔들었다. 그리고 결국.


  

랜드마크, 올림픽, 축제도시의 로마




  가장 피해야 할 오빠의 땅을 밟고야 말았다. 랜드마크가 세워진 로마... 거기다 축제도시에 올림픽 개최까지 최악의 악재가 겹친 그곳을... 결국 나는 소유한 모든 도시를 매각하고 632만 원이란 통행료를 지불한 뒤 장렬히 전사하고 말았다. (참고로 남편이 파산한 금액은 300만 원대...)


  그렇게 장장 2시간의 부루마블은 또다시 아들의 승리로 끝이 났다. 자신은 '모두의 마블 챔피언' 이라며 잔뜩 의기양양한 아들에게 마음에도 없는 축하를 건넸다. 하지만 각오해라. 다음번엔 결단코 쓴 맛을 보여줄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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