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자작나무 숲, 인제

동화 속 세상같이 펼쳐진 풍경에 갇혀 행복했다.

by 벽우 김영래

순백의 세상을 보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겨울이 겨울답지 않게 따뜻하고 눈도 내리지 않는다. 눈이 오더라도 금세 녹아 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침묵 같은 풍경 속에 빠져버리는 겨울이 오래되었다. 이젠 기대감도 손을 떠난 풍선처럼 멀리 사라져 가는 듯하다.

산골짜기 숲 속에 순백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내리는 눈이 만들어 내는 백설과 하늘로 오르는 순백이 어우러져 춤추는 동화 속 같은 순수가 만들어지는 곳. 자작나무 숲이다.


동화 속 같은 자작나무 숲 속에 앉아서 풍경을 감상했다. @영래


인근 숙소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도착했지만 이미 주차장은 그릇에 넘치는 물처럼 2차선 도로 저 멀리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다. 풍경에 대한 기대보다 번잡함 때문에 가야 할까 하는 갈등이 파문처럼 일었지만 곧 접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찾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아침 일찍이면 한적함을 즐길 수 있을 거란 기대도 했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걸음을 시작했다. 산행 초입 안내원의 ‘아이젠 없이 올라가면 위험합니다.’라는 외침이 고장 난 레코드처럼 무한 반복되고 있었다. 눈이 사람의 발에 밟혀 다져지고 녹아서 얼음이 되어 미끄러웠다.

사람들은 다 제각각이었다. 평상복 차림에 캐주얼화를 신고 거뜬히 오르는 사람도 있었고, 배낭에 스틱과 스피치까지 완전무장을 한 멋쟁이도 있었다. 삼삼오오 연인과 가족과 손을 잡고 오르는 사람들 속에 우리도 있었다. 눈과 빙판으로 코팅된 길을 미리 준비한 아이젠과 스틱이 여유롭게 해 주었다. 주변 곳곳에 심은 어린 자작나무들이 소소한 풍경을 만들어 냈고, 눈이 녹은 물이 눈 속으로 흘러들어 슬러시처럼 질퍽대는 길 위를 재작 재작 걸으며 지난 일들에 관해 얘기를 나누었다.

분주하게 오르고 내려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오히려 익명성이 더해져 고요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늘 하던 아이들 얘기, 부모님과 미래의 이야기까지 모든 주제들이 제각각 봄 꽃망울처럼 터져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다정한 풍경도 있었다. 유치원생쯤으로 보이는 아들, 딸을 양손에 잡은 젊은 엄마가 우리 눈앞에서 그만 꽈당하고 미끄러졌다. 아이들이 난처한 표정으로 엄마를 향해 ‘괜찮냐’ 고 묻자, 엄마는 아이들을 향해 ‘이렇게 넘어지면 위험해 조심하자’라고 대답했다. 주변 사람들 보기에도 무안하고 아이들에게도 미안한 엄마의 말에서 사랑이 느껴졌다. 늙은 노모의 손을 잡고 걷는 중년 신사의 시선이 저 멀리 숲 속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였다.

양지바른 길은 수프처럼 질척이는 진흙길이 되었고, 구부러져 햇살이 가려진 응달엔 눈이 쌓여 미끄러웠다.

남들이 1시간 남짓이면 오르는 길을 우리는 더 오래 걸렸다. 하지만 대화가 있어 힘들거나 지루할 틈이 없었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이라는 것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이런 여유와 서로의 생각을 여는 대화가 아닐까.

KakaoTalk_Photo_20190225_0718_40558.jpg 곧게 뻗은 자작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 @영래

숲에 다다르자 탄성이 터져 나왔다. 숲에 가기 전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지만 화면의 느낌보다 훨씬 넓고, 크게 다가왔다. 어떤 기기나 기록으로도 직접 보는 감동을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나무 밑에 펼쳐진 백설의 바탕 위에 속살 같은 뽀얀 피부로 곧은 자태를 뽐내는 자작나무 수 천 그루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동화 속 백설공주가 정말 나올 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 삶이 각박하고 건조해도 누구나 맘속에 동화 한편쯤은 간직하고 있기에 동경하는 닮고 싶은 순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도 찍고, 나무도 껴안아 보고, 한참을 섰다가 금방 일어서기 아까워 자리를 깔고 앉았다. 눈 위에 앉아서 보이는 주변은 온통 백색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진한 코발트 빛깔 하늘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순백을 통해 순수를 표현하는 풍경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다.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던 것도, 두 시가 넘어 먹은 막국수가 너무 맛있었던 것도,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 신나고 청량감이 넘쳐 즐거웠던 것도, 동화 속 풍경에 갇혀있던 행복감 때문이었다. 순수에 표백된 마음이 휘발되지 않도록 풍경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가겠다.


자작나무 숲길.jpg 자작나무 숲 그림 @영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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