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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래 Mar 29. 2021

주름처럼 늘어가는 걱정- 이사 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걱정 때문에 걱정이다

  20대 때에는 빨리 결혼해서 30대가 되면 생활이 안정돼 방황하지 않으니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들 낳고 열심히 살다 보니 40대가 되었다. 직장에서 아래 위로 치고 애들 전쟁 같은 학교생활 뒷바라지에 뒤돌아볼 새도 없이 후딱 지나갔다. 그래서 또 생각했다. 빨리 50이 되면 좋겠다고. 직장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있고 애들도 자기 삶을 갖게 될 테니 맘 좀 놓고 살겠거니 했다.  

  하지만 시간은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그림자처럼 늘 저만치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온 거리만큼 아이들이 바짝 밑에 따라와 있었고, 부모님은 그만큼 멀리 가 계셨다. 이젠 직장생활과 부모봉양이라는 과제가 눈 앞에 현실로 다가와 있다. 그렇다고 이제는 빨리 60대가 되었으면 하고 바랄 수가 없다. 걱정이 하나 둘 쌓이는 게 걱정이다. 


  부모님 이사를 결심하기까지 몇 번을 망설였다. 60년을 넘게 한 자리에서 살았는데 눈 감고도 알 수 있는 그 모든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움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가 젤 큰 이유였다.   

  이웃으로 마실 다니며 소통도 하고 텃밭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서 활력을 유지해야 하는 데 그런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  시골에선 반장이나 이장이 돌아다니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챙겨주지만 도시에선 스스로 챙겨야 한다. 하다못해 이웃에 초상이 나면 방송을 하는데 문 닫고 살면 옆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도시생활이다.  

  시골살이가 좋은 게 백가지라도 버티기 힘든 한 가지가 더 절실하니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낡아서 고장 나는 집. 더 이상 땜질식 처방을 하기엔 한계에 다다랐다. 비바람 불면 전기가 안 들어오기도 하고, 연탄-기름 겸용으로 쓰는 보일러지만 돈이 아까워 주야장천 연탄만 때는 아버지는 새벽에도 잔기침을 하며 일어나신다. 이웃도 외지인들이 하나 둘 오면서 측량을 하고 마당에 빨간 막대기를 꼽아 경계를 짓고 울타리를 쳤다. 인심이 야박하게 돌아갔다.  

  병원에 한 번 갈라면 신작로까지 한참을 나가 버스 시간을 맞춰야 하고 돌아오는 길엔 지쳐서 약을 두배로 써야 했다. 그렇다고 자식들만 목 빼고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걸 알면서도 내 생활을 유지하려니 맘은 있어도 현실은 늘 거리가 있다.      

  이런 연유로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시내 작은 연립 같은 거라도 알아봐서 이사를 가자고 몇 번 말씀을 하셨고, 망설임 끝에 마침내 시장 가까운 곳에 집을 마련했다.       


  정말 이사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했을 때 아버지는 망설이는 듯했다. 금방이라도 갈 것처럼 서두르시던 것과 달라 당황스러웠다. 엄마는 더했다. '난 그냥 여기 살란다' 하셨다.  

  당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데다 자식들 뒷바라지에 좋은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고, 누추한 집에 손님이라도 오거나, 땜질 수리를 할 때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한 번 살아보고 아니면 집 팔아 다시 시골로 나가는 계획과 이사 가면 이렇게 좋은 게 많다고 설득했다. 

  시장이 가까이 있고, 차 시간에 쫓기지 않고 만병통치약 같은 물리치료도 실컷 받을 수 있다. 이-삼천 원을 아끼려고 점심을 굶으며 배 골치 않고 쉬엄쉬엄 걸어도 30분이면 집에 도착해 밥 먹을 수 있다. 1층 화단에 파 심고, 뒷마당에 스티로폼 화분을 만들어 고추나 상추도 가꿔 먹을 수 있다. 장독대도, 빨랫줄도 있다. 당장 눈 앞에 좋은 것들을 만물상처럼 늘어놨다. 설탕같은 말이 용암처럼 흘러 갈등을 덮고 넘었다.     


첫 번째 걱정이 현실 앞에 다가왔다. 인터넷 검색 후 찾아 간 리모델링 업체의 견적서를 받아 들었을 때였다. 집 값만큼 나오는 비용을 감당하려니 깜깜해진 눈 앞에 이리저리 굴러 다니는 계산기 숫자들이 아른거렸다. 생각대로 안되면 팔고 다시 시골 갈 생각 아니었냐며 아내가 더 힘을 냈다.    

  이왕지사 고치는 거 제대로 하자며 바닥부터 천정까지 뼈다귀만 남기고 다 뜯어고치기로 했다. 오래되고 낡은 연립이라 걱정이 됐는지 리모델링 전날 부부는 집이 무너지고, 엉망진창이 되는 꿈으로 잠을 설쳤다. 꿈은 반대라고 한 달여에 걸친 공사는 일정대로 차근차근 잘 진행되었고, 모양을 갖춰 갈수록 걱정 대신 기대감에 이삿날을 설레며 기다리게 되었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고 전화를 해 '이삿짐 다 싸놨다' , '리모도리' 다 끝났냐고 자꾸 물으셨다.    


  이사 전 날. 육십 년을 살아오신 집에서 오만 잡동사니까지 다 싸들고 갈 계획인 부모님에게 집을 먼저 보여 드리려고 이부자리 몇 개만 들고 새 집 문을 열어 드렸다.  

  첫눈에 놀라셨다. 새로 산 소파에 앉아 보시고 안방, 화장실이며 보일러실 등을 둘러보시더니 환하게 웃으셨다. 

  "이제 양화리에서 우리 집이 젤 좋구나. 참 좋다. 늘그막에 호강하네"하며 당황스러울 만큼 좋아하셨다.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 좋아하시는 데 진작 할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삼월 스무하룻날 삼 형제가 다 모여 이삿짐을 날랐다. 전날 집을 보여 드린 덕분에 이삿짐을 많이 덜었다.  오래된 이웃들이 하나 둘 찾아와 마당에 모였다. 개울 건너 할머니는 서운함에 눈물을 흘렸다. 엄마는 들마루에 앉아 오래된 동무들과 사진을 찍었다. 

  점심때가 좀 넘어 짐 정리가 끝나고 새집에서 짜장면을 먹은 후 동생과 누나가 집으로 돌아가고 아내와 난 뒷정리를 마저 하며 커튼을 달고 있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약봉지를 꺼내 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투는 것이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다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같은 소리가 계속 반복되었다.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귀가 어두워 상대방 얘기가 들리지 않으니 오해가 부풀고 비틀어지고 있었다. 엄마를 말리면 아버지가 소리를 냈고, 아버지를 잡으니 '내가 뭘 잘못했냐'며 엄마가 서운해했다. 

  이 사건은 새로운 걱정의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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