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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벽우 김영래 Jan 18. 2019

강추위에 세차하기

세차는 자신감 인가

  “아 세차 좀 해야 할 텐데. 우리 꼬마 자동차 붕붕이 너무 지저분해.”

  보름째 계속되는 강설과 강추위 속에서 나의 작은 차량은 앞 유리창만 빼꼼하고 몸집은 자동차의 형상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더러워져 있었다.   

  참을 수 없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전설의 고향에서 ‘뒤를 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고 말하지만 그 호기심을 견뎌 낼 수 있는 사람이 있겠나! ‘머리를 좀 깎아야겠다.’고 맘먹고 이발소에 갔는데 마침 휴일이면 그걸 다음으로 미루기는 쉽지 않다. 테니스를 치려는 데  비가 오면 실내에서 당구를 치던, 탁구를 치던 대체할 것이 있는데 날이 꽁꽁 얼었으니 대체할 뭐가 없어서 마냥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빙판길 질주하던 차가 미끄러지듯 추위는 풀릴 기미가 안 보이고 한 번 먹은 맘을 꺾기가 쉽지 않았다. 차를 타고 내릴 때마다 미안하고 아쉬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만 있었다. 모스크바보다 더 낮은 기온 속에서 눈이 내렸고, 양념으로 염화칼슘이 듬뿍 추가된 호박범벅 같은 길을 달렸으니 자동차는 앞 유리창만 졸린 눈 뜬 것처럼 간신히 열려 있었다.    


  영하 5도인데도 10도 아래로 떨어진 날이 별로 없던 터라 며칠 전 날에 비하면 양반이어서 그런지 집 앞 셀프세차장엔 지저분함을 참을 수 없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제법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 가운데가 비어 잽싸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미리 준비한 오백 원짜리 동전을 들고 버튼을 선택한 뒤 넣으니 윙하는 시작음이 들렸다. 여느 때 같으면 고압분사 총에서 뿜어지는 물줄기에 뜨거운 가마솥에 눈 녹듯 허물어지며 흘러내리는 때 구정물이 맘속까지 시원하게 씻어 주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세차를 시작했다는 안도감은 아주 순식간에 끝나고 차체의 얼룩이 채 벗어지기도 전에 반쯤 흘러내린 구정물이 얼어 버리고 말았다. 차는 순식간에 유리로 코팅을 한 듯 반짝거렸다. 고압의 물줄기가 닿으면 그 순간엔 때가 씻겼지만 아래로 흘러내린 물은 그대로 멈춰 얼었다. 작은 차의 반을 다 씻기도 전에 돈에 허락된 시간이 다 흘러갔다. 차는 얼음으로 조각한 예술품처럼 변했다. 거품을 칠해야 하나 갈등이 생겼다. 혹시 거기서는 뜨거운 물이 나오겠지 하고 솔 세차를 시도해 보았지만 솔은 얼음 위의 썰매처럼 미끄러지기만 했다. 다시 강력한 물줄기로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두 바퀴를 돌며 때 국물을 씻어 냈다. 운전석에 앉아 햇볕이 있는 공간으로 이동을 하려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불투명으로 변해버린 앞 유리창 때문에 창문을 열고 아주 조금씩 움직여 빈 공터로 이동했다. 


  햇살은 위대했다. 수십만 광년을 달려온 그 햇살에 온기가 실려 있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뒤를 닦고 나니 앞 유리의 얼음은 여전했다. 다시 차를 돌려 햇살을 앞에서 받으며 유리에 얼음을 녹이며 닦았다. 

  세월을 못 이기겠다는 듯 사람의 검버섯처럼 도색 위로 녹이 오르는 곳이 군데군데 보였지만 다른 때보다도 더 반짝이는 연노랑의 작은 차는 봄 병아리처럼 다시 태어났다. 차가 더 잘 나갈 것 같고, 더 값져 보이고, 더 뿌듯했다. 이건 무슨 자신감이지. 눈 한번 오면 다시 얼룩으로 뒤 덮여 조금 전 모습으로 돌아갈 테지만 지금 이 순간은 어떤 것보다도 만족스러웠다. 이 쓸데없는 허영심은 뭐지.  

  집에 와서도 따스한 양달에 두 시간을 더 세워둔 후 햇살이 저물 때쯤 지하에 주차를 했다.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하며 밥을 먹다 문득 말끔하게 단장한 기특한 녀석을 빨리 만나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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