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커피를 내리려고 그라인더를 잡았다. 왼쪽에 있어 무심코 왼손으로 잡아 오른손으로 돌렸더니 대번에 어색했다. 왼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잡고 왼손으로 돌려야 자연스러운데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돌렸더니 몸이 금방 알아챘다. 익숙한 것에 익숙한 줄 모르며 지나는 시간이 일상이라면 여행은 이런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닐까. 낯선 풍경과 낯선 길, 평소에 듣던 말들이 아니다. 어디를 갈까. 뭘 할까. 행복한 고민과 긴장을 하게 되는 것. 사람들은 도전과 모험심으로 가득 차 있어 모든 낯선 것들과의 만남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다.
첫날 느지막한 일정이 겨우 산보였는데 오 킬로 정도를 걷고 돌아와 씻고 앉았으니 피곤해서 초저녁에 잠깐 졸고 일어났다. 할 일이 없어 일기를 쓰다 시간을 보니 열한 시가 넘었다. 새벽 예불에 참석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걱정이 됐다. 누워서 불렀던 잠은 점점 달아났다. 새벽 예불이 내내 걱정이었다. 또 아들이 서울서 군대 간 친구 면회 약속을 만들어 놨으니 낼은 어쨌든 다시 집으로 가야만 했다. 남도 끝자락에서 네다섯 시간을 혼자 운전하는 일이 보통 일은 아닌데. 단 몇 시간만이라도 좀 잤으면 좋겠는데...
세 시에도 시간을 봤었고, 잠든 건 아닌데 잠든 것처럼 있다가 목탁소리를 들었다.
어이쿠! 네 시가 넘었구나. 한 번 경험해봤으면 했던 일이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뻑뻑한 눈을 비비고 문을 열었더니 희미한 가로등이 서늘한 산 바람과 함께 밀려왔다.
저 멀리 법당에서 스님 독경외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댓돌 위에 신발이 여럿 있었다. 안을 들여다보니 자리가 없었다. 맨 꼴찌려니 하고 문지방을 넘어 바로 좁은 틈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을 앞에 두고 관람만 할 생각이었다. 한참 눈을 감고 있는데 몇몇이 더 들어왔다. 가는 길을 열어 주고 내 자리를 고집하며 버티는데 템플스테이를 이끄는 자원봉사자가 나 더러 나오라며 맨 앞에 방석을 깔아 주는 것이 아닌가. 이런 난감할 때가.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에 소란이라도 날까 그가 가리키는 손을 따라가 앉았다. 조금 있으니 살짝씩 바닥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지금이 절하는 타임이구나. 하지만 그 순간순간마다 돌아보고 따라 할 수는 없었다. 모른 척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한 4-50분을 독경소리만 듣고 있으니 다리도 저리고 허리도 아팠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대웅전 앞마당을 뒷짐 지고 서너 바퀴 돌았다. 나름 제대로 수행 한셈이 되었다.
스님과 차담을 나누기 위해 정좌를 하고 앉았다. 스님 첫마디가 "나도 잘 몰라요."였다. 질문을 해도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차만 서너 번 거푸 우려내셨다. 해바라기씨와 호두를 먹으며 사담부터 수행 이야기까지 차맛처럼 밋밋하고 잔잔한 시간이었다. 수행이 뭔지 잘 모르는데 문득문득 아주 짧게 막 웃음이 나고 행복한 그런 기쁨은 아닌데 희열이 느껴지는 때가 있단다. 그게 지속되지 않고 아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거나 뚝뚝 끊어진다는 것이었다. 그걸 지속시킬 수 있는 게 수행인 것 같다고.
옆으로 자리를 옮겨 명상과 요가 체험을 했다. 나름대로 체력단련을 틈틈이 해온 터라 균형 잡고 몸 움직이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눈을 감거나 한 손, 한 발로 가만히 서 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균형 못 잡는 것은 괜찮습니다. 힘 빼세요."
"눈을 뜨지 말고 몸을 느끼고, 몸을 보세요."
몸에서 뼈가 부러지고, 어디가 깨지는 것은 금방 고치는데 속이 아픈 것은 어쩌지 못한다. 그래서 몸속의 염증을 없애고, 에너지를 골고루 돌려줘야 하는데 요가와 명상이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깊게 마신 숨을 멀리 내뱉는 과정을 몇 번 했다고 잠을 못 자 아픈 머리가 꽤 맑아졌다. 몸은 믿는 데로 만들어지고 움직이나 보다.
성보박물관에서 미륵불과 서산대사와 초의선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어려운 이야기가 대부분이었고,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이 있었다. 옛날엔 왕만 금색 옷을 입을 수 있었는데 왕이 내린 금란가사(서산대사에게 내린 금색 옷이 보관되어 있음)가 왕의 권력을 대신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종교는 권력이 아닌데, 고승이 남긴 유물을 권력의 상징으로 기억하는 건 아닌가. 그만큼 소중하단 얘기겠지.
아무것도 안 하는 계획 중에도 스마트 폰을 완전히 닫지 못했다. 친구의 지적처럼 face북을 보고, 책을 읽다 야구 응원팀 스코어를 보는 속세의 욕심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광복절을 낀 징검다리 하루 휴가를 얻어 보낸 휴식의 시간, 설렘에 답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