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엔 계획이 있고, 동선을 짜 시간에 맞춰 톱니바퀴처럼 착착 움직여줘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는 계획이 있다니. 역시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
힐링 숲길을 달려 대흥사에 도착해 등록을 마쳤는데도 4시가 좀 안됐다. 산 바람이 들어오는 문을 열고 나섰다. 대웅전 앞의 신성한 기운을 뒤로하고 계곡을 내려가는 물소리를 따라 건너편 마당으로 나아갔다. 거대한 연리근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있었다. 수령이 500년은 되었고, 뿌리가 엉켜 한 몸이 되었다. 사랑을 하려거든 연리근처럼 해야지 사랑한다 말할 수 있으려나. 이렇게 사랑하고 어찌 감당하려고. 어찌 이렇게 당당할까. 무심한 듯 태연하기도.
부드러운 능선의 두륜산 봉우리가 부처님 자태로 누워서 절을 둘러싸고 있다. 뭘 얻으려고 온 게 아니니 발걸음이 더 느리다. 계단 꼭대기에 올라앉아 두륜산을 머리에 이고 침묵처럼 무거운 기와지붕들을 내려다보았다. 방문객들이 돌아가 텅 빈 마당과 길들이 한가롭다.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왔던 길을 다시 돌아왔다. 한 번 더 크게 빙 돌아 저 멀리로 걸음을 옮겨서 걸었다. 여유가 느껴졌다. 서산대사의 깨달음이 저절로 내 몸속으로 들어왔나.
저녁 공양하라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렸다. 스님을 따라 냇가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갔다. 이른 저녁이라 템플스테이에 참여한 우리 몇 명 밖에 없었다. 공양소 기둥엔 묵언이 쓰여 있었다. 조용했다. 혹시 밤에 배 고플까 봐 바나나 하나와 쿠키까지 꼼꼼히 챙겼다. 이 욕심은 버리지 못했다.
방에 돌아와 뒹굴거리는 중에 문 밖에서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 기도를 갈랴는 물음이었다. 반가움에 냉큼 따라나섰더니 오늘은 저녁 예불이 없단다. 시간을 보니 6시였다. 차를 타고 들어 왔던 숲 길을 걷자며 자원봉사자가 앞장섰다.
숲길은 차를 타고 올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고, 못 들었던 소리를 들려주었다. 크게 들리는 계곡 물소리와 나무들이 뱉어낸 신선한 숨들이 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뒷짐 짚고 걷는 걸음이 3km가 넘었는데 숲과 계곡을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출발했던 대웅전 앞마당에 서니 컴컴해진 하늘과 지붕 대신 금빛 조명을 입은 부처님 모습이 나타났다. 스스로 경건해졌다. 마당 한편에 앉았다. 거북이 입으로 쏟아지는 약수를 마시며 땀을 식히고 방으로 돌아왔다.
새벽 예불에 참여하려면 일찍 잠들어야 하는데, 기대하고 바라면 반대로 가는 인생처럼 잠이 올 생각을 안 한다. 중독된 TV도 없이 우두커니 앉아 있으려니 멋쩍어서 시간을 되돌아보며 글을 쓴다.
새벽 4시에 있을 예불은 새로운 경험이겠지. 11시가 넘었는데 아직 잠들지 않았다. 걱정되지도 않는다. 낼 아침은 또 어떻게 되겠지. 온전한 휴식으로 다가온 첫날 템플이 설렘이었던 것처럼.
계획은 그냥 계획일 뿐이니까. 못 일어나면 못하는 건데 아마도 일어날 것 같다. 어둠을 뚫고 나를 깨우는 종소리가 문 밖에서 들리면 그냥 일어나 볼 작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