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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레이 Aug 25. 2019

질투 고자

나를 울고, 웃게 했던 그 감정들


질투 고자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질투 고자'였다.
사실 그런 면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질투가 나면,
질투를 부인하기보다는 인정하고,
왜 질투하는지 알아보려고 나 자신과 대화를 한다.

그 안에는 질투하느라 힘들었던 연약한 나도 있고,
단순한 질투가 아닌, 성장을 위한 동력원이 될 녀석을 만나게 될 때도 있다.

내가 '질투 고자'의 삶을 벗어나게 된 건,
아내를 만나고, 나 자신과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부터다.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사랑에 대한 질투)

왜 '질투 고자'였는지, '질투'는 무엇인지 정의해보려면, 우선 지난 연애/사랑에 대한 경험부터 들쳐 봐야 할 것 같다.

서른 하나의 나는

연애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서로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우위를 점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감정을 가지고 밀당하고,
이 사람, 저 사람을 비교하면서 재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나의 재미를 위한 게임이니까.

나는 이 연애라는 게임에서 철저히 이기는 전략을 취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지 않았고, 상대가 저 많은 것을 주게끔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이기고 있는 게임에 질투라는 감정은 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참 나쁜 연애 상대였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사랑에 있어질 '질투 고자'였다. 정확하게는 사랑을 몰랐고, 그래서 질투할 줄도 몰랐다.

그랬던 내가 가진 것 이상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사람을 만났다. 연애로 보면,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지는 것이지만.
더 주지 못하는 게 안타까운 이 만남은 애당초 연애의 룰에 들어가지 않았다. 자연스레 밀당도,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랑을 텍스트가 아니라, 몸으로 느낀 것이다.


이기거나 지지 않아야 하는 연애 게임의 경쟁 대상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싶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다.

그 사람에게 나는 유일한 사랑이고 싶었고, 그 사람의 눈빛과 따스한 말들이 나만을 향했으면 했다. 그것들이 닿는 곳에 있는 사람, 사물이 부럽고 미웠다.

모든 것을 가질 수 없기에, 내가 갖지 못한 것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음을 알기에,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더 단단하고, 더 따뜻한 뿌리를 가진 나무가 되어, 언제든 그 사람이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기로 했다. 질투가 나를 키운 셈이다.


지금도 나는 질투한다.

카페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아내를 보면서, 그림의 대상이 되는 것들과 그림 도구들을 질투한다.

아내를 미소 짓게 만드는 인스타그램의 댓글들과 팔로워들을 질투한다. 아내와 카카오톡을 하는 친구들을 질투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나의 '질투'는 갖지 못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며, '사랑의 뒤편에 있는 그늘'이고, 동시에 나를 성장시키는 좋은 자양분임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질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P.S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노랫말보다
'질투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는 말이 내게는 더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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