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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레이 Oct 09. 2019

수요일, 회사를 안 갔다

서른 하나, 평범한 직장인 남자의 일기

수요일, 회사를 안 갔다.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을 만들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한글날을 덕에 회사도 안 가게 해주시다니 세종대왕님을 존경하고,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덕분에 늦게까지 침대에서 뒹굴면서 핸드폰을 만지면서 스포츠뉴스도 보고, 웹툰도 보다가 일어났다. 오랜만에 느긋이 토스트도 굽고, 과일도 먹는 호사를 누리고 대충 씻고 옷만 걸치고 부동산에 며칠 전 이야기해뒀던 아파트를 보러 갔다. 보러 간 집은 마음에 들지 않아 아쉬웠지만, 사람 없는 거리를 여유롭게 걸어 다닐 수 있던 건 힐링이었다. 몸도 마음도, '시간도' 많았던 우리는 집에 돌아와 다시 침대로 들어가 아침잠을 보충했다.


슬슬 배가 고파 눈을 뜬 우리는 냉장고를 뒤지며 무슨 요리를 할까 생각하다가, 머리 아프지 말고 외식을 가서 남이 설거지해둔 깨끗한 접시 위에 맛있게 만들어준 음식을 올려서 몸도 마음도 편하게 먹기로 하고 광화문 '수사'로 향했다.

외출하기 전에는 빨래하고 건조만 하고 신경 쓰지 못했던 옷가지들을 가지런히 개고, 오랜만에 창문도 활짝 열고 청소기도 돌리고, 환기도 시켰다.


집을 나와 지하철에 탔다. 분명 사람이 없어야 할 시간인데, 웬일인지 광화문을 향하는 열차에는 사람이 가득하다. 자세히 보니 다들 플라스틱 막대기나 태극기, 퇴출/파면이라는 말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다.

아, 시위행 열차였다.


광화문까지는 엄두도 못 내고, 종각에 내려 걸어가기로 했는데 출퇴근 시간처럼 사람이 가득하다.

밖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모두 시위를 하러 모인 분들이다.

오늘은 한글날인데, 한글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날인데, 솔직하게는 '쉬는 날'인데, 이렇게 나와서 시위를 하는 분들을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인으로서는 존경심도 들었다.


광화문과 세종문화회관을 가득 채운 태극기 물결에 충격받은 우리는 조용히 광화문 D타워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했다. 평소 휴일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회사 밀집 지역이 오랜만에 활기차다. 커피숍에도 식당에도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손님들로 북적댄다. 요즘같이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는 지역 경제에 도움을 주는 행위는 무엇이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음식 세 접시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많다. 아 세종대왕님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시간... 감사한 마음을 되새기며 후식으로 커피와 용과를 2개 먹었다. 수요일 낮에 먹으니 더 맛있고 값진 식사였다.


오랜만에 전 직장이 있던 광화문과 종각, 인사동을 걸으며 시간을 보냈다. 외출의 목적 중 하나였던 작은 스케치북도 하나 샀고, 집에 들어와서는 과일을 깎아 영화를 보면서 먹었다. 그래도 시간이 넉넉하다. 아... 세종대왕님.....


평소였으면 자정 언저리에 완성했을 글을 밤 11시도 되기 전에 마무리하고 있다.

회사를 안 간 덕분에 보낼 수 있었던 소중했던 수요일 하루,

다시 한번 세종대왕님께 감사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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