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섯 번째 이야기
#20180216
6년 차 커플이라고 하면 주변에서 묻는 게 비슷하다.
'아직도 좋아? 아직도 설레? 안 싸워?'
'어떻게 그렇게 오래 사귈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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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그 두 번째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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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뱀이 되지 마라"
성질이 다르면 부딪힌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평생 같이 살아온 가족과도 싸우는데 평생 달리 살아온 연인과의 마찰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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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왜 부딪히는지', '어떻게 부딪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부딪히는 것 자체를 피해버린다는 것이다.
부딪히지 않고, 은근슬쩍 넘어가는 방식을 찾는다.
마치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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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면 당장의 마찰은 사라진다.
대신 관계는 깊어지지 않고, 껍데기만 두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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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통증은 없지만, 오히려 증세는 악화되게 만드는 '진통제'처럼.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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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전에도 몇 번의 연애를 했었다.
좋은 사람도 만났고, 나쁜 사람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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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나도 좋은 사람이었고, 나쁜 사람이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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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니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쁜 사람이었다.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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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관계에서 나는 상대방이 원하거나, 내가 원하는 일만 했다.
마찰이 나올 것만 같으면 금세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비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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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관계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속으로는 깊어지지 못 했다.
먼저 도망쳤던 찌질했던 나 때문에, 상대편의 노력에도 관계는 깊어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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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의 연애를 하고,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딱 두 번째 데이트만에 문제가 생겼다.
다녔던 회사를 찾아가 여자친구를 인사시켰던 그날,
언제나 그랬듯 거절도 못 하고, 사무실에 붙잡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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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는 1시간 가까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공간에서,'나'를 기다려야만 했다.
정말 미안했지만, 문제가 커지는 게 싫었던 나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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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패했다. 몸통을 잡힌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마찰'을 겪었다.
온몸이 뜨겁고, 머리털이 쭈뼛서고, 식은땀이 쏟아졌다.
첫 경험의 성장통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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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후로도 크고 작은 마찰이 생겼다
그때도 나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고 싶었지만,
성장통을 겪고 나니 이게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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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우리만의 방식으로 버텨나갔다.
3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카페에서 눈물 콧물을 쏟기도 했고,
헐크가 돼서 부들부들 떨기도 했고, 청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돼서 드라이브하며 소리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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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덕분에 우리는 깊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
마찰은 싸움이 아니라, 마주 보고 찰진 관계를 만들어가는 뜨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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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수많은 도마뱀들이 있다는 걸 안다.
도마뱀 선배로서 꼭 말해주고 싶다.
마찰이 무서워 꼬리를 자르고 도망간다면, 지금 당장은 좋겠지만
머지않은 미래에 당신은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이다.
꼬리를 자르지 마라. 그래야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