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전, 이른 아침에 세일즈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정말 죄송한데요… 자정쯤 장애가 발생했고 아직 해결이 안 됐습니다. 가능하시면 현장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택시를 타고 고객사로 향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서른 명은 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모두가 말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장애는 여섯 시간이 넘어서야 복구됐습니다.
현장은 무거운 침묵과 피로로 가득했고, 모두 지쳐 있었습니다.
“와줘서 고맙다”라고 했지만, 돌이켜보면 제가 특별히 해결한 건 없었습니다.
회의에 함께 앉아 상황을 정리했고, 필요한 에스컬레이션을 연결했을 뿐입니다.
그 이후로도 큰 장애나 대규모 작업이 있을 때면 현장을 지키거나 밤을 함께 새우곤 했습니다.
어느 날 동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것보다… 항상 필요할 때, 그리고 가장 궂은 자리를 지켜줘서 고마워요.”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는 기억.
누군가의 가장 어려운 순간을 혼자 두지 않았다는 확신.
시간이 지나며 그 기억은 하나의 감정으로 남았습니다.
저는 그걸 자부심이라고 부릅니다.
자부심은 박수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칭찬이 없다고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어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했다는 기억.
그곳에서 자랍니다.
특히 엔지니어와 개발자의 일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설정 하나,
아무도 칭찬하지 않는 안정성,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운영과 배포,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한밤의 장애 대응.
문제가 없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성과 보고서의 제목이 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내안의 자부심은 쌓여 갑니다.
잘 드러난 성과가 아니라, 문제가 생기지 않게 만든 시간들에서…
박수가 아니라, 조용히 지나간 밤들에서…
자존심이 지키려는 것이라면, 자부심은 이미 견뎌온 것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래서 진짜 자부심을 가진 엔지니어는 굳이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필요할 때 자리를 비우지 않았는지,
떠나지 말아야 할 순간에 남아 있었는지.
그 질문 앞에서 스스로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대부분의 좋은 엔지니어들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가장 정확하게, 가장 묵묵하게 자기 자리를 지킵니다.
그리고 그 밤들을 통과한 사람만이 압니다.
그 밤들이, 그 선택들이, 결국 자신을 지탱해 온 힘이었다는 것을.
자부심은 누군가가 붙여주는 훈장이 아니라,
스스로의 밤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