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드 보통의 <불안>을 통해 건네는 나의 생각

서평

by 루카형아



이 글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라는 도서를 읽고 작성하였다. 들어가기에 앞서 에세이라는 글에 대한 작은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나는 대개의 에세이를 읽을 때 작가가 발화한 안건을 통해 평소 내가 해 왔던, 혹은 해야 하는 것들을 사유하곤 한다. 에세이를 읽혀지는 것들을 통해 내 생각을 다시금 데워보는 것이 그것을 음미하는 이상적인 방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에세이를 읽으며 자연히 글감을 편식하는 버릇도 생겨날 수 있으나 꾸역꾸역 완독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적당히 잘 쓰여진 에세이는 글 하나하나의 구조를 살피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각종 미사여구를 덕지덕지 붙여두는 에세이도 있다. 더불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을 남용하여 작성자 본인조차도 적확히 이해할 수 없는 글들도 수없이 많다.


내가 추구하는 에세이는 그런 형태가 아니다.


에세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글들 중에 가장 정확하고도 쉽게 읽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잘 쓰려는 노력을 삼가해야 한다.(매우 어려운 일) 한 문장을 읽기 위해 지나친 노력이 들어서는 안된다. 글을 자주 써보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의 글을 내놓기 위해 지나치게 힘을 들인다. 되레 겁을 먹고 펜을 놓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에세이는 적어도 어렵게 쓰는 글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쉽게 읽히기 위해서는 일단 쉽게 써야 한다.


글쓰기에 있어서는 Just Do It이 이루어져야 한다.

추후에 그것들을 걷어내도 괜찮으니 힘과 긴장이 가득 서린 글을 쏟아내 보는 것이다. 글쓰기란 비로소 쓰는 행위를 함으로써 형성되기 시작한다. 수십번을 고쳐서도 글의 남루함을 피하기 어려우니, 온전한 글을 단번에 취하려 하는 것은 지나친 편법에 가깝다.




이 책은 적당히 잘 쓰인 철학 에세이다.


작가의 문체가 마음에 들어 완독했다기보다는 이 책에서 사용된 몇 가지의 조각들이 이 시대에 충분히 음미해봄직한 것들이라고 기대했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그 기대가 무력하지는 않았음에 안도한다.


이 책은 불안을 소재로, 크게 원인과 해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불안의 원인을 1. 사랑결핍, 2. 속물근성, 3. 기대, 4. 능력주의, 5. 불확실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1. 사랑결핍 :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날 때부터 자신의 가치에 확신을 갖지 못하고 괴로워할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이 우리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하게 된다. (p.21)

2. 속물근성 :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 (p.29)

3. 기대 :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p.57)

4. 능력주의 :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 성공을 거둔 사람이 그럴 자격이 있다면, 실패한 사람 역시 그럴 만해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p.108)

5. 불확실성 : 사업의 일차적 목적은 이윤의 실현이라고 규정하는 경제적 요구다. 또 하나는 피고용자가 경제적 안정, 존경, 종신직을 갈망하도록 이끄는 인간적 요구다. 이 두 가지 요구가 오랜 기간 이렇다 할 마찰 없이 공존할 수도 있지만, 이 둘 사이에서 진지하게 어느 한쪽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상업적 체제의 논리 때문에 언제나 경제적 요구가 선택된다. 이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임금에 의존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삶에서는 불안이 떠날 수가 없다.(p.134)


이러한 정의를 바탕으로 인상적이었던 몇가지 문장을 가져와 그에 따른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가난이 낮은 지위에 대한 전래의 물질적 형벌이라면,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p.38)


인류는 언제나 빈곤과 가난의 고통에 맞서 싸워왔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다양한 금전적인 지원으로 그것에 응전하였으나, 지금의 가난은 예전의 그것과는 조금 더 억센 기질을 가진 듯 하다.


우리는 제한된 자본을 영위하나 우리의 시선은 이제는 제한없는 시야로 다양한 이들의 삶을 투과한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해를 입은 반지하 거주민의 삶이 생중계되며, 바로 옆에서는 수도권 소재의 수십억원 대의 아파트에 거주하는 부유한 이들의 모습이 대중에게 노출된다.


불과 몇년 전의 빈곤층은 그저 빈곤한 삶만을 누리면 되었으나, 이제는 그것으로 비롯된 무시와 외면, 그것으로 인한 좌절과 어둠까지 그들의 몫이 되었다. 과거보다 물질적, 제도적 지원은 분명히 활성화되었으나 세상, 그리고 그 안의 우리는 조금 더 속물적인 성질을 갖게 되었다.

인류는 질곡의 시간을 거쳐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동일한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세상을 이루어낸 것으로 보였으나,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고 손에 놓인 것보다 잡지 못한 것을 더욱 갈망하는 무한한 욕심의 굴레 안에 속박되어 있다. 충족되지 못하는 지독한 의지에 지배받는 시간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최근에 베스트셀러 라인업에 쇼펜하우어의 철학 도서들이 쉽게 안착하는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갖지 못한 자를 더욱 소홀히 여기고, 가진 자들을 더욱 추앙하는 모습이 이 시대가 우리에게 부추기는 사상적 배경이 되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은 자연스레 빈곤층을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처럼 빈곤으로부터 발아하는 사회적인 문제는 더이상 물질로만 대변되는 일차원적인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깊이 살펴야 하는 난제가 되었다.


윌리엄 제임스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을 거두어야만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일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반드시 수모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가치관을 걸고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에만 수모를 느낀다. 무엇을 승리로 해석하느냐, 무엇을 실패로 간주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목표다. (p.70)


시도가 없으면 실패도 없고, 실패가 없으면 수모도 없다. 따라서 이 세계에서 자존심은 전적으로 자신이 무엇이 되도록 또 무슨 일을 하도록 스스로 밀어붙이느냐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자기 자신의 잠재력에 대한 실제 성취비율에 의해 결정된다. 제임스는 자존심을 다음과 같은 방정식으로 표현한다.


제임스의 방정식 : 자존심 = 이룬 것 / 내세운 것

장-자크 루소는 부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이제 상술했던 빈곤에 대한 여러 문장들과 연계가 된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알랭 드 보통은 본 서에서 우리는 불안이 사라질 수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불안과 공생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고민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매 순간 불안을 해소하기를 원하며, 모든 불안을 해소한 것이 곧 안정된 삶으로 귀결될 것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우리 곁에는 항상 불안이 있기 마련이니, 이러한 사고로 일관한다면 우리는 평생을 불안의 구속 아래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결국, 불안이 곁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책의 마지막에는 불안을 위한 해결책들(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안)이 제시되어 있다.


1. 철학 : 이성의 규칙에 따르면 주어진 결론은 타당성 있는 최초의 전제에서 출발하여 일련의 논리적 사고를 거쳐 도출되었을 경우에만, 오직 그런 경우에만 참으로 간주된다. 철학자들은 수학이 훌륭한 사고의 모범이라고 생각하여 윤리적인 생활에서도 수학의 객관적 확실성에 준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철학자들은 우리의 지위가 장터의 감정이나 변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지적인 양심에 의지하여 안정을 얻을 수 있는데, 이것은 이성 덕분이라고 보았다.(p.148)

2. 예술 : 우리가 비극 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비극 작품은 아주 작은 단계들, 종종 아무 뜻도 없어 보이는 단계들을 통하여 교묘하게 주인공의 성공을 몰락과 연결시켜 나간다. 우리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의 이야기의 뼈대를 읽었을 경우라면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p.198)

3. 정치 : 이데올로적인 진술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정치적 감각이 없으면 그 편파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p.256)

4. 기독교 : 기독교는 위계의 개념을 없앤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윤리적이고 비물질적인 방식으로 재규정했다. 가난이 선과 공존할 수 있고, 초라한 직업이 고귀한 영혼과 공존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p.315)

5. 보헤미안 : 부르주아지는 상업적 성공과 공적인 평판에 기초하여 지위를 부여한 반면, 보헤미안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 우아한 집이나 옷을 살 수 있는 능력보다 당연히 더 중요했던 것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냐, 감정의 주요한 저장소인 예술에 관람자나 창조자로서 헌신할 수 있으냐 하는 것이었다.(p.329)



나는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답변인 '철학을 통한 이성의 형성'을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기에 쉽게 그것에 휩싸여 표류하기도 한다. 그것을 방지하는 첫 걸음이 바로 철학이다.


우리는 매 순간 불안과 함께하는 만큼, 매 순간 안정을 갈망한다. 지위의 상승, 더 많은 부, 더 커다란 명예 등이 일시적인 안정을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러나 순간의 감정과 변덕으로 인해 우리가 세운 안정의 성벽은 파도 앞의 모래 성처럼 무너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어떤 상태가 되거나 어떤 것을 소유하면 불행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상태나 소유를 선망할 수 있다. 또 우리의 진정한 요구와 관련이 없는 야망을 갖게 될 수도 있다. 우리 감정은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를 건강과 미덕으로 이끌어주기도 하지만, 방종, 분노, 자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이렇게 감정은 과녁을 넘어가거나 못 미치기 십상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이성을 이용하여 감정을 적절한 목표로 이끌라고 충고해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서워할 만한 것인지 자문해보라는 것이다.


철학은 답을 내리는 학문이 아니다. 철학는 결코 정답을 도출하려 하지 않는다. 철학한다는 것은 결국 생각하는 것이며,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유영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당신의 불안을 이 글을 통해 잠재우고자 한다면, 이것을 빌려 당신의 이성의 체계를 세우고자 분투하면 된다. 물론 이 작업은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결코 부정하지 않고 존중한 상태어야 온당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이 본 서를 통해 독자에게 제안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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