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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24. 2019

공기청정기 사건

삐지는 건 남자도 마찬가지.

  무기력한 하루가 지났다. 무기력하게 있었지만 어제보단 나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매일 쓰겠다던 일기조차도 손이 가 질 않았다. 그야말로 모든 걸 내팽개치고 책이나 붙잡고 있는 게 가장 속 편했다. 살다 보면 이럴 때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요 며칠은 좀 심했다.


  아내와 신혼을 잘 만끽하며 지낸다고 생각했는데 며칠 전 '공기청정기'사건이 무기력의 원흉이 됐다. 아내가 여러 차례 공기청정기를 사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벌이가 되면 그때서야 살 수 있겠거니 하며 때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내는 공기청정기를 샀다. 샀던 공기청정기가 링크되어 톡으로 왔다. 이 모델이 어떤지 의향을 묻는 걸로 이해했다. 생각보다 저렴하다는 정도로만 답했다.


  집에 와서 아내가 장모님과 통화하는 중에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오늘 30만 원짜리 공기청정기를 샀는데 처남에게 말했더니 그걸 왜 샀냐고 무지막지한 핀잔을 주어 바로 취소했다고 말이다. 아내와 장모님은 처남의 그 까칠하고 집요한 성격을 농담 삼아 얘기하며 웃음꽃을 피우다가 장모님이 아내에게 물었다. '공기청정기 고르는 거 남편이 좀 하면 안 돼?' 장모님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아내의 대답으로 질문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내는 말했다. '얘는 이런 거 관심이 없어'


  이 대답과 동시에 서운함과 화가 밀려왔다. 즐겁게 저녁 먹은 후 소파에 기대 쉬는 도중 갑자기 날벼락이 떨어졌다. 아내도 나의 이런 반응은 생각지 못했을 거다. 아니 말하고 나서 '아차'했을지도 모른다.


  서운함의 포인트는 이거다. 아내가 번 돈 굳이 내 허락을 받고 살 필요는 없다. 자신이 좋은 걸 찾았다면 살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샀다는 말도 안 하고, 처남에게는 샀다고 말하고, 혹평을 받으니 바로 취소했다는 점과, 장모님에게 나를 공기청정기 하나 못 고르는 사위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순식간에 변한 내 표정을 보고 아내는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바로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다. 다음부터는 당신과 꼭 상의하겠노라고 다짐도 했다. 그 정도 됐으면 화가 풀릴 법도 한데 도저히 화가 풀리질 않는다. 그렇게 이틀이 지난 것이다. '내가 벌지는 못하지만 인터넷 뒤지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사용할 그놈의 공기청정기를 나만 빼놓고 친정 식구들에게만 얘기하고, 코멘트받고, 취소하고, 남자들의 주특기인 가전제품 고르는 것조차 못하는 못난 사람으로 만든 것이 못내 분했다. 바닥을 치고 있는 자존감이 1층 바닥을 뚫었다.


  이 일이 있고부터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했던 사과 따윈 생각도 나질 않았고, 아내가 일하러 들고나는 것조차 여느 때처럼 사랑으로 보내거나 반기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쌀쌀한 내 말과 행동에 울음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동안 대화와 눈물을 지속했다. 다 끝난 것 같다가도 다시 따져 묻고, 그러다 다시 눈물을 터트리고, 오해라며 설명하기도 하고. 이렇게 3시간가량 얘기했다. 한참을 얘기하다 아내도 지쳤는지 더 이상 눈물도 보이지 않았다.(아내는 오늘이 제일 많이 운 날이라고 했다.) 그리고 말없이 서로의 자리에 잠잠히 누워있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내 눈물보가 터졌다. 아내가 울 때의 표정을 따라 하며 오만상을 쓰며 터진 눈물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아내가 왜 우냐고 물었지만 너무 복받쳐 대답하기 힘들었다. 눈물의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먼저, 여러 차례 사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야박하게 계속 따지고 드는 못난 내가 싫었고 두 번째, 아내에게 사과하고 또 하게 만든 내가 싫었다. 그리고 마지막, 아내가 공기청정기가 필요하다고 얘기했을 때 떡하니 사놓을 수 없던 내 모습이 처량했다. 닫힌 창 안으로 공기도 없어 답답한데 마음까지 숨 막혔다. 울고 있는 나에게 아내는 경험담을 말한다. '소리 내서 울어. 울면 좀 개운해질 거야.' 그 말이 맞았다. 아내는 울고 있는 날 보며 그동안 차갑게 굴던 날 용서하고 위로한다.


  공기청정기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됐다. 아내의 큰 서운함 중 하나는 원가족과 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식의 내 태도라고 말한다. 나도 곱씹으며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볼 것이다.


  새벽일 하며 조금씩 모은 돈이 있다. 이걸로 공기청정기나 살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다. 아마 다가오는 차 만기보험료로 들어갈 것이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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