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영 Feb 19. 2019

아내와 함께 일한 다는 건

아드레날린 분비

  신기한 건 아내가 새벽에 같이 나가겠다는 거다. 밤 9시만 되면 가수면 상태로 돌입하는 아내가 새벽에 나와 같이 알바를 하겠다고 한다. 이건 내가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미 마음의 각오는 했었으리라. 아내 휴가기간에 맞춰진 새벽 서포트는 나를 들뜨게 했다. 이 늦은 새벽에 함께 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하고 힘이 났다. 혼자 일하던 나에게 생기를 불어넣는 효과랄까? 고독도 많이 즐겼으니 함께라는 즐거움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아내가 함께 일한다는 것이 무척 기뻤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됐다. 처음 드는 걱정은 아내의 얼굴이 팔릴까 하는 걱정이었다. 종종 여자분들도 있지만 남자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마치 남학생들만 빽빽한 공대에 몇몇 여학생들만 섞여 있는 느낌이다. 이런 곳에 아내를 데리고 가자니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 새벽까지 아내를 데리고 나와 고생시키는 못난 남편, 그리고 못난 남편을 만난 불쌍한 아내로 보이지 않을까 걱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내는 단순하다. 그런저런 생각 없이 그저 남편이 새벽에 어떻게 일하는가 보러 온 것이다. 그게 전부다. 공기질을 핑계로 마스크를 쓰라고 했지만 당당히 얼굴을 들이민다.


  그것 말고 다른 걱정도 있었다. 일을 하다가 싸우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었다. 마치 운전연습을 시켜주는 남편의 마인드로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아니면 아내가 내 일하는 방법과 스타일에 대해 잔소리해서 빈정이 상해 싸움이 되는 걱정이다. 하지만 아내의 성격을 알기에 그렇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천사표 아내와 부딪히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항상 싸움의 시작은 나니깐.


  들떠있는 나를 보고 말한다. "왜 이렇게 업 됐어?" 신이 나서 운전하는 나를 릴랙스 시키려 했으나 흥분이 줄어들지를 모른다. 이 흥분의 본질은 그동안 내가 이 새벽에 어떻게 일하는지를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실직 중에도 조금이나마 가사에 보태보려 이 새벽에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각인시켜 '이 남자 그래도 책임감 있는 남자구나!' 하는 모습을 보여주려 생각하니 이토록 아드레날린이 분비됐던 것이다.


  일이 시작됐다. 물류창고에서 물건을 받아 분류하며 바코드를 찍고, 차에 적재하는 과정을 지켜보는 중 아내가 조언한다. 롤테이너(개인 할당된 이동식 적재함)에서 물건을 내리면서 바코드를 찍으면 빠뜨리는 것 없이 더 빠를 것 같다고 말이다. 그동안의 내 방식(물건을 모두 내린 후 바코드를 찍는)이 빠르다고 생각했지만 아내와 둘이 일하게 된 지금으로선 아내가 말한 방법이 빠를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아내는 눈썰미가 좋고 손이 빠르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멀티가 되는 인간형이다. 그걸 아는 나로선 아내의 말을 듣는 게 전혀 손해 나는 장사가 아니며 자존심만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다. 나의 겸손함과 아내의 지혜로움이 합쳐져 속도가 붙었다.


  물건을 배송하는 가운데 아내는 차에 실려있는 다음 이동할 목적지의 주인을 찾는다. 배송하고 돌아오면 바로 다음 목적지로 출발, 그리고 도착하면 나는 아내가 찾아놓은 물건을 들고 배송을 가고, 아내는 다시 그다음 배송 물건을 찾는다. 점점 기계적인 일처리를 진행하며 역시 부부란 마이너스가 아닌 플러스의 인생임을 다시금 상기한다.


  몸이 지쳐갈 때면 아내가 준비해온 인스턴트 삼립 호떡과 초콜릿, 그리고 보온병에 담긴 물을 마시며 원기를 충전한다. 아내는 새벽에 먹지 않으니 모두 나의 것이다. 배를 채우고 다시금 아내와 협업하여 열심히 일한다. 하지만 인생은 항상 수월할 수만은 없다. 왜 이 새벽에 와서 귀찮게 하냐는 경비아저씨와의 짜증 섞인 훈계와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 없는 상가형 오피스텔, 그리고 동을 찾을 수 없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의 방황, 외길로 양쪽에 주차되어 있는 차량을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야 하는 곡예운전의 여러 난코스를 연속해서 만났다. 하지만 어떤 곳에서는 아내의 길 밝음과 방향감각이 도움이 되었고, 때로는 나의 운전 스킬이 발현되며 이 난코스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다. 물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으나 서로 어떻게 해야 할까를 고민하며 일을 진행하니 해결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내의 휴가기간이 구정 연휴를 합쳐 2주 가까이 되었고, 이 피 같은 휴가기간 중 3, 4일은 나와 함께 새벽을 깨웠다. 아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간단히 씻고 침대로 들어가 기절한다. 한창 꿈속에 있을 시간에 깨어 일을 한다는 자체가 기적이다. 우린 비슷하게 곯아떨어져도 아내는 항상 먼저 깨어 있다. 평소보다 늦기는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잠이 없고, 부지런하다.


  아내와 함께 일한다는 건 생각도 해본 적이 없지만 이번 함께한 새벽 알바 경험이 꽤나 흡족하다. 아내에겐 어떻게 기억될지 모르겠으나 한 번으로 그치지 않을걸 보니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그중 하루 아내의 빨리 하자는 재촉으로 기분이 상해 화를 낸 그 한 번을 제외하곤 매우 성공적인 경험이다.


  얼마 전 아내가 말했다.


"새벽에 너랑 일해보니 드는 생각이 있어"


"뭔데?"


"네가 빨리 다른 일자리를 구했으면 좋겠어"


"새벽마다 경비아저씨와 씨름하고 위험천만한 운전하는 게 걱정되고 안쓰러워"



  언제쯤 자리 잡힌 일자리를 갖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요 며칠 아내와 함께 일했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내가 쉬는 날이면 살살 긁어 새벽 데이트를 즐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설날을 앞두고 벌어진 슬픈 사건과 그 의미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