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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Feb 27. 2019

타인의 고통

처남과의 일담

   남의 속사정은 당사자 아니면 모르는 거니 누구든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 남 말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그게 칼인 줄도 모르고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러쿵저러쿵 썰어대지만 사려 깊은 사람들은 조심 또 조심하는 게 예의렷다.


  최근 장모님 생신 겸 하여 처가 식구들이 모여 식사를 한 후 처남 네가 이사 간 새집을 구경하기로 했다. 처가 일정을 하루에 두 개나 소화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참으로 뿌듯하고 대견하다. 예전보다 익숙해진 새 가족들과의 만남은 약간의 어색함은 있으나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가족 식사 장소는 뷔페식당으로 잡았다. 하지만 가격이 4만 원이라 잔치집인 줄 알았는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먹고 난 후 가족 대부분이 실망했다. 장인어른의 인상적인 한마디 "분명 먹은 것 같은데 뭘 먹었는지 모르겠다" 나도 수위조절을 해가며 이 뷔페집이 별로인 점 몇 가지를 얘기했다. 실망의 말을 모두 내뱉지 못한 건 외견상 꽤나 맛있게 먹은 터라 겸연쩍어서이다. 실은 그냥저냥 먹을만한 뷔페지만 제 값을 못하는 것뿐이다.


  접시 한가득 담아 몇 차례 왔다 갔다 얼추 먹고 나니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니 슬슬 대화가 이뤄지기 시작한다. 먼저 처남의 근황을 물었다. 최근 기간제 교사 채용 때문에 맘고생 한 점을 아내에게 들어 처남에게 더 자세한 스토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물론 처음은 명목상 내비치는 가족 간의 대화였다. 내 고통이 세상 제일의 고통이라 생각하기에 처남 사연을 여유 있게 들어줄 마음의 자세는 벌써부터 준비되어있었다. 처남은 아직 내가 열심히 일하고 있는 줄 알고 있겠지만 난 7개월 전부터 실업인(?)으로 살고 있음을 감춘 채 처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처남이 이력서를 넣는 시기는 학교들의 개학 전 바로 요즘이었다. 주전공으로 하여 10곳 정도 이력서를 넣었지만 연락 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고 했다. 이때 심경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는데 "내 이력서를 아무데서도 받아주질 않으니 내가 지금까지 일한 7~8년의 경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졌고,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는 솔직한 심경을 얘기했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나로선 충분이 공감이 됐고,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처남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옆에서 식사를 하며 처남의 간증을 듣고 있던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제각각 한 말씀씩 하신다. "매년 같은 어려움을 겪느니 정식 채용을 위한 임용 준비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어", "취업이 된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임용 준비를 했으면 좋겠어" 두 아이의 아버지인 처남이 이번에 취업이 되지 않았다면 당장 생계는 어떻게 꾸려가야 할지 막막했을 처남의 선택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장기적 안목으로 대처하라는 두 분의 아들을 향한 진정 어린 마음도 느껴졌다.


  처남의 아내는 우리가 얘기하는 테이블 끝 멀찌감치 서서 갓난쟁이를 안아 달래고 있었고, 두 살배기 첫째 아이는 할아버지 손에 붙들려 뷔페 내 놀이방으로 향했다. '만약 아버지의 취업이 막히면 두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에 대한 둘 간 고민의 흔적은 아내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처남이 취업하지 못했다면 아내가 일을 알아봤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력서 넣은 곳에서 연락이 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는 처남에게 아내는 자신이 벌면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도 전했다.


  그동안 내 문제에 함몰되다 보니 타인의 고통이 그리 크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것 같다는 모든 힘든 자의 착각처럼 나 또한 그 착각 속에 빠져 살고 있었다. 물론 내 고통을 누군가의 고통과 단순 비교하는 건 이치에 맞지 않지만, 대충 생각해봐도 자식새끼 둘씩이나 딸린 집과 자식새끼 없이 부부 둘만 생각하면 되는 집과의 비교는 애초부터 되지 않으며, 지니고 있는 무게감 또한 거기다 함부로 들이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내의 고통도 함께 생각했다. 아내는 일터에서 시간이 날 때면 동생과 나의 취업자리를 함께 찾고 있음을 알았다. 수시로 "여긴 어때?, 저긴 어때?" 하며 남동생과 남편의 취업을 동시에 걱정했던 아내가 지닌 무게감 또한 서글프게 다가왔다. 이런 웃픈 현실에 또다시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다.


  아까의 식사자리에서 처남이 말했다. "1년 계약직으로 매년 새로운 학교를 알아보며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하지만 그때마다 신을 의지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라고 말이다. 처남의 믿음에 놀랐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인지 몰라도 취업 막차를 탔다. 주야장천 하늘에 삿대질하고, 성장과 성찰의 기회로 삼지 못하는 나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누구나 현실 속에서 고통스러운 상황을 겪지만 처남처럼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나름의 성찰의 기회로 생각하고 하나하나 극복해나가는 게 우리의 삶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에 함몰되어 타인의 고통을 가벼이 여기는 몹쓸 굴레에서도 빠져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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