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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영 Jan 13. 2019

아버지를 닮았다.

나도 모르게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내와 강남데이트를 즐겼다. 아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지하철 역에서 조우했다. 사람이 붐비는 지하철역 대부분이 퇴근하는 사람으로 보이며 바쁘게 걸음 하는 그들에게 부러운 눈빛을 보낸다. 이중 나와 같은 백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으로 위안 삼으며 사람들을 어깨를 비비고 지나간다. 그래도 아내의 손을 붙잡고 다니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아내와 종종 가는 양꼬치집을 찾아갔더니 이미 늦었다. 겨우 해야 2~30석 밖에 안 되는 작은 식당에 벌써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고 물으니 사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1시간은 넘어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양꼬치를 1시간 동안 먹나?" 옆에 있는 아내에게 말했지만 술과 함께라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데 이미 지하철 역에서는 많은 거리를 걸어왔다. 왜 맛집은 외지고 구석진 곳에 있어야 하는가? 사실 그렇게 외지지도 구석지지도 않았지만 역에서 거리를 따져보면 도심에서 벗어나 꽤 멀리 있는 것은 분명하니 외지고 구석지다고 해두자.


  아내가 강남에서 데이트하자고 했던 건 나를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나에게 힘을 실어줄 방법을 연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천성이 착해 본능적으로 내 심사를 맞춰주려 노력한다. 강남데이트가 내 심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낮에 홀로 집을 지킬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 후에 강남 데이트하자고 말이다. 아내는 평소 책을 읽는 모습을 자주 목격한다. 난 책을 읽고 나서 마음에 감동이 오면 가끔 아내에게 얘기하기도 한다. 지식을 머리에 저장한 것을 복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입이 근질거려서 하는 자랑질이기도 하지만 아내에게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증거를 들이밀기 위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다 몇 권의 책을 읽고 나서 읽고 싶은 책이 있다는 투로 말하며 강남에 있는 '중고서적 갔다 와야 하는데'라고  말한다. 시간 내서 혼자 갔다 오겠다는 말이었다. 아내는 어떤 책을 보고 싶냐고 말해 '싯다르타', '태백산맥', '돈키호테'를 읽고 싶다고 했다. 아내가 책 제목을 기억하진 않았겠지만 내가 보고 싶은 책을 사러 강남으로 가리라는 것은 기억한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목적지가 '강남'이 된 것이다. 강남이 아니고서 서점이 없는가? 그렇지는 않지만 강남에 '중고서적'이 있다. 예스 24 중고서적, 알라딘 중고서적 두 곳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강남을 오가는 많은 이들의 안식처라고 생각한다. 물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곳에서는 새책 같은 중고책도 물밀듯이 밀려든다. 다 읽은 책들이 소장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이 그 책을 팔기도 한다. 나도 다 읽은 책을 가지고 나갈까 생각했다. 아내도 몇 권 가지고 나와 맞교환하라고 말했지만 오늘은 귀찮은 마음에 그냥 두었다.


  보고 싶은 책을 다 산들 바로 읽지 않을 것을 안다.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속독이 어려우며, 책의 종류에 따라 집중력이 흐려질 때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최근에 책에 재미를 붙였다. 특히 한국사를 재미로 공부하면서 세계사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세계사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 고전 문학이나 근대문학이 필수였다. 그래서 이 책들을 구입하는 기쁨을 주려고 강남데이트를 신청한 것이다. 이것은 내 추측이 아니다. 아내가 점심쯤 전화가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책도 사자고 말했다. 오늘은 한껏 들떠있는 날이다. 내가 읽고 싶던 책 중에 '돈키호테 1권'을 득템 했기 때문이다. 영화와 만화로만 봤지 이렇게 두꺼운 소설로 두 권씩이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누군지 몰라도 이 책을 읽은 흔적이 없다. 나에게 새책을 값싸게 선물해 주어 고맙긴 하지만 어찌 이리 새책인지 예전 내 학창 시절 때의 문제집을 보는 느낌이다. 아누 깨끗하다. 심지어 앞부분 까지. 오늘은 돈키호테 2권까지 구입하지 않았다. 그 두꺼운 1권을 다 읽고, 이것을 팔고 2권을 살 거다. 아내가 준 아이디어다. 오늘은 2권이 없었지만 이 책을 다 읽을 쯔음에는 2권이 있을 거다. 그렇게 믿는다.


  돈키호테가 읽고 싶었던 것은 집에서 방콕 하는 나에게 자극을 주기 위해서다. 정신 나간 돈키호테는 로시난테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바보 같은 기사도를 뽐낸다. 대략 떠오르는 시나리오만으로도 위안을 줄 것 같은 느낌 백프로이다. 책방에서 이런것 까지 판매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정교한 미니 방 꾸미기 세트'를 보고 '우와, 우와'를 연발하는 아내에게 내 밑바닥까지 빡빡 긁어모아 새 모이처럼 아껴 쓰고 있는 비상자금을 털어 아내에게 선물했다. 이로서 아내와 나는 득템을 하고 강남 바닥을 떠난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내가 말한다. '너는 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아.' 그 말을 한 배경은 아버지도 지금 생을 정리하는 자서전을 쓰고 있다. 무려 400백 장에 육박하는 페이지에 자신의 생애를 담았다. 자신의 생애를 담기에는 어쩌면 부족한지도 모르지만 위업을 달성한 위인이 아닌 한 자연인의 생애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 400페이지 안에는 자신을 비롯한 가족 모두의 성장과정이 담겨있다. 우리 가족에게 분명 유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 활용을 못하고 오롯이 수기로만 작성한 자서전의 진행상황을 알고 있는 아내가 나를 보며 닮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는 것이 뭐가 이상한가? 당연한 것이지 말이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생각보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걸 보니 닮고 싶지 않았나 보다. 어릴 때 엄하고 무섭게만 느껴지던 힘 있는 아버지에서 지금의 힘이 빠진 아버지를 보는 것은 아들로서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다. 특히 아버지의 강직한 부분, 이전에는 고리타분하고 고집이 세다고 느꼈던 부분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 아버지와 반대되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난 다르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아버지의 성격을 닮은 것은 형이나 남동생이라고 떠넘겼다. 하지만 아내는 내가 닮았다고 한다. 고집스럽고 억척스럽게 삶을 살아오셨고 지금의 자서전 작업도 동일한 모습으로 진행 중이시다. 백수생활 중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자 브런치에 읽기 형식의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아버지와 비슷해 보였나 보다. 아버지의 취미생활도 역사와 자연, 동물에 대한 이해다. '동물의 세계'를 비롯한 다큐멘터리를 좋아하시고 역사드라마를 즐겨보시는 것을 보면 내가 지금 그렇고 있지 않은가? 아내의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떤 힘에 이끌려 강제 동의했다.


  아버지의 삶과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삶을 하찮게 여기거나 의미 없게 여긴 것은 아니다. 단지 가부장적인 시대를 살아오신 아버지의 모습과는 다르게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고 자유와 진실로 뻗어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고 나니 아버지와의 정치 논쟁이 떠오르지만 하지 않겠다. 이걸 얘기하자면 오늘의 주제가 바뀔지 모른다.


  나이 40을 바라보는 난 아버지를 닮았다. 닮아가고 있는 건지 아니면 태어났을 때부터 닮아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아버지를 향해 가고 있다. 아내에게는 청출어람이 되리라 말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아버지의 발뒤꿈치나 따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삼 형제를 키워낸 영웅이니 말이다. 어쩌면 아버지의 자서전은 필히 남겨 후손에 전해야 할 유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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