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사에서 출간
가지 끝에 매달린
잘 익은 가을 하나.
바알갛게 익었고나.
서러운
그대 가슴,
까치도 어찌지 못하는
이 땅의
고독 하나!
-「잘 익은 가을 하나」 전문
이은봉 시인이 시조집 『잘 익은 가을 하나』를 동학사에서 발간했다. 이번에 출간한 『잘 익은 가을 하나』는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에 이어 출간된 두 번째 시조집이다.
『잘 익은 가을 하나』는 그의 첫 번째 시조집 『분청사기 파편들에 대한 단상』과 함께 여러 면에서 기존의 시조를 갱신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조는 무엇보다 창으로 불리는 시조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시조로서 이미지들이 거듭 충돌하는 가운데 신선한 형상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시조집 『잘 익은 가을 하나』는 시절가조(時節歌調)로서의 시의성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드높은 심미적 정신 차원을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당대의 현실이 갖는 사물의 구체성을 십분 받아들이면서도 한층 높은 예술적 경지를 압축된 3장 6구 45자 내외의 형식을 통해 추구하고 있는 것이 기존 시조집들과의 차별성이다. 이런 부분은 「벽돌 한 장」, 「시커먼 저것」, 「철쭉꽃」, 「동짓날 즈음」, 「잘 익은 가을 하나」, 「겨울나무」, 「산정호수」, 「금강석」 등의 시에서 잘 드러난다.
두 번째는 형식적 정제미를 충분히 받아들이면서도 사물의 본질을 되묻고 있는 점이다. 사물의 본질을 되묻는다는 것은 존재의 비밀을 탐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내부에 어떤 진실을 담고 있거니와, 시조는 그것을 밝혀 드러내는 언어예술형식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시조집에서는 특히 「쓰러진 굴참나무」, 「연꽃 한 송이」, 「고요」, 「때」, 「달밤」, 「청개구리」, 「연어」, 「늦가을」 등의 작품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이번 시조를 통해 어긋난 생태 현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동시에 존귀하면서도 신비한 생명을 드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물질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그로부터 연유하는 생명의 신비, 자연의 질서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 그의 이 시조집이라는 얘기이다. 「시커먼 저것」, 「담쟁이들」, 「동짓달 즈음」, 「봄 하늘」, 「때」, 「초가을」 「가을 소리」 등의 시조가 그러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예이다.
네 번째로 드러나는 특징은 반복적으로 사랑의 진실을 되묻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시조집에서 살펴볼 수 있는 사랑의 진실은 매우 순수하면서도 원초적이다. 사랑이 지니는 원초성, 시원성을 충분히 존중하며 사랑의 진실을 되묻고 있는 것이 이번 시조집에 드러나 있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진실성이다. 그가 보기에는 서정시가 지니는 근원적인 합일의 정신이 사랑이 지니는 본래적인 일치의 정신과 서로 통하기 때문이다. 「사프란꽃」, 「방아개비」, 「풀꽃반지」, 「옛사랑」, 「집」, 「복사꽃」 등의 시조가 그 예이다.
다섯 번째는 이번 시조집의 표지 디자인이다. 이번 시조집의 디자인은 장정, 활자 등의 면이 매우 아름다운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시조집에 실린 시편들에는 풍성한 비유, 곧 충만한 은유나 환유, 제유 등의 수사를 통해 시조의 예술성을 현대적으로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이 이번 시조집의 특징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제석한 숲 그늘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오는 겨울 바라보며
가는 가을 듣는다.
세상일 다 색계이거늘,
듣고 본들
무엇 하랴!
-「오는 겨울」 전문
『잘 익은 가을 하나』에는 존재의 진실을 묻고 찾는 방식을 통해 시조의 인식 기능을 심화, 확대하는데 기여할 뿐만 아니라 예술이 저 자신의 내면에 지닐 수밖에 없는 사물성을 심화, 확대해 심미적 효과를 제고하는 특징을 보여준다. 「잘 마른 장작개비」, 「봄 하늘」, 「올해 여름」, 「분수」, 「버려진 타이어」, 「민들레 씨앗 털」, 「꽃바다」, 「산수유 열매들」 등의 시조가 그 예이다.
이은봉 시인은 이번 시조집의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저 자신의 “서정적 열정이 아름다우면서도 높고 넓게, 깊고 그윽하게 담겨 있기를 빈다”고 썼다. 이는 시조집을 읽는 독자들이 시조를 통해 높고 넓은, 깊고 그윽한 서정적 심미의식에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을 밝히고 있다.
평생을 후학 양성에 받친 이은봉 시인은 광주대학교에서 퇴임한 후에 다시 자신의 문학의 고향인 대전으로 돌아와 대전문학관 관장을 4년간 역임하면서 지역의 문학 발전을 견인했다. 그리고 지금은 세종에 인문학연구소를 열어 지역 후배 문인들과 더불어 인문학과 시에 대한 소통을 이어가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운전하고 내려간 일
수도 없이 많았다.
눈비가 오는 날에는
사고도 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인지
발걸음 안 떨어진다.
쉬었다 가라는 것이리라.
지쳤다는 것이리라.
이 길이 아니면
어느 누가 밥을 주랴.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전대를 다잡는다.
-「호남선 고속도로」 전문
이은봉 시인은 1983년 《삶의문학》에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평론가로 등단한 이후에 1984년 《창작과비평》에 신작시집 「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해서 지금까지 13권의 시집을 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