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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서정 시인 Dec 28. 2022

내 딸의 자존감 높이기 프로젝트

성형미인



아가야

너를 위해 새로 준비한 거울이

도착할 때까지

이 세상 모든 거울이 하는 말은

다 거짓이란다

그러니 절대 거울 앞에서

동화에 나오는 주문을 외우지 말거라

네가 기다리는

왕자는 이미 드라마 주인공으로 차출되었고

난 늙었고 넌 젊었으니

우린 서로 다른 시간대를 걷는 여행자

어미가 걸어온 가시밭길은 모두

철거되었으니

너는 꽃길만 걸어라 아가야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동화 속 마녀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을 묻거든

자신 있게 애비와 어미를 부정하거라

세상에서 가장 예쁜 아가야

곧 너의 생일 파티가 시작될 예정이니

단숨에 촛불을 꺼야 한다

파티의 초대 손님은 너를 새로 낳아준 흰 가운에 메스

세상의 모든 동화는 다시 쓰이기 시작했고

나는 이미 니 어미가 아니란다



-  『어디서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까』, 조용숙 시집, 북인, 2020



한 3년 전 내 생일날 신동엽문학관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갑자기 나를 불러낸 엄마가 손을 잡아끌더니 나를 어디론가로 데리고 가셨다. 도대체 어디에 가는 거냐고 물었더니 그냥 조용히 따라 오란다. 그렇게 따라간 곳이 바로 부여에 있는 작은 금은방이었다. 금은방에 도착한 엄마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에 싼 팔찌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내셨다.


“니 아버지가 엄마 회갑 때 해 준거야.

 엄마가 이거 가지고 있으면 뭐하겠냐. 니 목걸이 하고 반지로 바꿔줄라고...”


내가 아무리 싫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그날 나는 얼떨결에 엄마한테서 금목걸이와 금반지 하나를 얻어 꼈다. 그날 엄마는 내 손에 반지를 끼워 주시면서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이거는 아무리 어려워도 팔아먹으면 안 된다.

 나중에 엄마 죽걸랑 이거 보면서 엄마 생각하라고 해 주는 거니까...”


결혼식 때 금반지도 하나 못 받아 서운하다면서 엄마가 내 손에 끼워준 금반지가 있었다. 엄마는 그때도 팔아먹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런데 대학원 입학금이 없어서 그 반지를 팔 수밖에 없었다. 대학원 등록금이 없어 팔았다는 말에 엄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 눈엔 귀금속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는 당신 딸이 못내 마음에 걸리셨나 보다.


“엄마!~ 나한테 이런 거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왜 굳이 이런 걸 해 줄라고 그러셔요?”


“아무 소리도 말어! 가만 생각해 보면 내가 너한테 해 준 것이 너무 없어

 없는 집에 태어나게 한 것도 미안하고

 또 공부하고 싶어 했는데 학교 제대로 못 보내 준 것도 미안하고

 너는 니 딸한테 성형수술도 시켜 줬는디

 엄마는 고작 이것밖에 못해줘서 미안하다.“


헉!~ 이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엄마야 말로 성형수술 절대 반대 의견을 펼치신 분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엄마!~ 저한테 그러셨잖아요.

 왜 멀쩡한 애를 가지고 그 난리를 피우냐고

 성형수술 안 해도 이쁘니까 그냥 두라고

 그러실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는 딴 소리를 하신대요?“


“그것은 너 혼자 벌어서 힘들게 사는 디 니가 또 니 딸 땜시

 돈을 쓸까봐 그랬지...“


엄마는 나를 걱정하고 계셨던 것이다. 엄마는 당신 딸인 나를 걱정하고 나는 내 딸을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쁘게 됐더라.

 너무 자연스러워서 수술한 티가 전혀 안 나서 좋더라“


나를 쏙 빼닮은 내 딸은 예쁘지는 않아도 귀여운 아이였다. 그런데 낮은 자존감이 문제였다. 자존감이 낮게 형성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다. 가장 큰 원인은 어려서부터 언어 발달이 늦었던 것. 아이가 언어를 막 배우기 시작하던 그 무렵에 서둘러 어린이집에 보냈던 내 탓이 않은가 싶다. 그래서 엄마는 항상 아이들한테 빚쟁이다.


딸은 한참 말을 배울 때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던 터라 요구사항이 있어도 표현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물론 엄마인 나는 딸아이의 말을 알아들었지만 애아빠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 버럭하고 소리부터 질렀다. 그러니 밖으로 뱉어내야 할 말을 뱉어내지 못하고 눈치만 보다가 메모장에 써서 요구사항을 전달하곤 했다. 이런 환경이 열 살 넘어서까지 계속됐던 것 같다. 당시에 병원에도 데리고 가봤지만 신체적인 이상은 없다는 소견이었다. 요즘 같으면 언어치료라도 받았겠지만 그때는 전혀 그런 개념조차도 없었다.


또 하나는 평탄치 못한 가정환경도 한몫했다. 그러니까 딸아이 네 살 생일 때였던 것 같다. 아이 눈에 장에서 본 토끼가 예뻐 보였던지 토끼를 키우고 싶어 했다. 안 그래도 이제나 저제나 동물을 키우고 싶어 했던 애 아빠가 이때다 싶었는지 인터넷을 검색해서 토끼를 분양한다는 집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딸아이를 데리고 옆 동네에 가서 토끼를 분양 받아왔다. 하얀색 털에 까만 눈동자 그리고 검은색 귀를 가진 예쁜 토끼였다.


우리 가족이 되었으니 가장 먼저 호탄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애들도 애 아빠도 워낙 토끼를 예뻐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애 아빠가 워낙 토끼한테 집착하는 바람에 둘째로 태어나서 한참 아빠 사랑을 받아야 할 딸은 늘 뒷전이었다.


한 번은 토끼가 먹이를 잘 먹지 않아서 동물병원에 데리고 갔는데 세수하면서 털을 많이 먹어서 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약을 먹이면서 털을 삭혀 준다는 키위를 사다 토끼한테 갈아 먹였다. 아이들이 어릴때라 애들도 키위를 먹고 싶어했는데 애들한테는 하나도 안 주고 토끼한테만 줬던 일도 있었다. 맛있는 것이 있어도 토기 먼저였고 가족과 보내야 할 휴일에도 토끼에게 먹일 풀을 뜯기 위해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빨래를 널어야 할 베란다는 온통 토끼에게 먹일 풀들로 가득했다.


이 과정에 나는 토끼 똥 치우는 하녀로 전락했고 우리 아이들은 가정 내에서 서열이 토끼 다음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러는 사이 딸아이가 토끼를 질투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뭐 자존감 하락에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 보통 일반 가정에서 사료를 먹여 키우는 토끼의 평균 수명이 1년 정도라고 하는데 우리 호탄이는 7년 넘게 살다 갔으니 사람으로 치면 천수를 누리고 하늘나라로 갔다.


성형은 이런 저런 복잡 다난한 사유로 자존감이 유난히 낮았던 딸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외모보다는 본인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라는 전제 조건을 붙인 후에 수술을 결정했다. 힘들게 수술 결정을 한 후에 서울에서 성형 잘하는 병원을 알아봤다. 그리고 수술 당일 시외버스를 타고 부여까지 내려오려면 힘들것 같다는 생각에 병원 근처 호텔을 예약했다. 그렇게 딸아이를 수술방에 혼자 들여보내 놓고 이 시를 썼던것 같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에 수술방에서 나온 딸이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엄마 나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이렇게 무서운 줄 알았으면 성형한다고 안 했을 거야

 나 다시는 성형 같은 거 안 하고 살래"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싶었다. 혼자 수술방에 누워 공포에 떨었을 딸을 생각하니까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어쩌랴! 이미 수술을 했으니 회복을 잘하는 수밖에... 이제는 시간이 흘러서 수술 부위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상태다.


수술 이후에는 무엇보다 스스로 내면을 채워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상담 교육을 받게 했다.  앞으로 밥 먹고 사는 일에 도움이 되는 상담 관련 자격증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상담 교육까지 받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왔다.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필요한 운전면허 취득을 도왔다. 물론 운전면허를 쉽게  딴 것은 아니라서 내 통장에서 돈이 엄청 나갔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딸은 전에 비해 자존감이 많이 향상된 편이지만 여전히 아르바이트 면접에서 번번이 떨어지면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지금도 엄마는 당신 딸인 나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잘 주무신다. 그런가 하면 나는  또 내 딸을 걱정하느라 늘 전전긍긍이다. 이것이 바로 엄마라는 이름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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