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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레이싱 모델과의 작업을
좋아하는 이유

혹시나 해서라고? 나도 양심이 있습니다.

by 휠로그

"야, 나도 양심이 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박기훈(송새벽 분)이 자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최유라(권나라 분)에게 한 말이다. 엎어진 작품에 같이 깔려 망한 감독과 망한 배우인 그들은 놓지도 끊지도 못할 연애를 했다. 그런데 최유라는 마지막에 배우로 조금이나마 풀렸다. 영화 일을 접고 청소를 하며 살아가는 기훈과는 끝이 정해져 있으니, "결혼까지는 힘들 거예요"라고 최유라는 말했는데, 거기에 대한 기훈의 답이 저것이다.


나는 자동차 관련 컨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다. 사진과 영상 등 시각 컨텐츠가 다수다. 그런데 이 차라는 것, 몇 억을 하건 몇십 억을 하건 그냥 쇳덩어리다. 경우에 따라 카본 파이버인 경우도 있다. 그래봐야 비싼 무생물이다. 결국 이 무생물을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기왕이면 호감 가는 외모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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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 전에 대중음악과 관련된 일을 했다. 대중음악을 포함한 거개 대중문화는 이성애적 정서를 전제로 한다. 자동차 컨텐츠라고 다를 것이 없다. 매력적인 여성이 등장할수록 컨텐츠는 볼만해진다. 보려는 사람도 늘어난다.


그래서 주로 모델, 특히 레이싱 모델과 작업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모델이란 직업군 안에서 레이싱 모델이 엄격하게 구획지어진 직능은 아니다. 2007년 레이싱 모델이 직업 사전에 등재되긴 했지만, 지금도 피팅 모델을 하다가 주말 레이싱 경기에 혹은 모터쇼나 신차 발표회 등에 모델로 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레이싱 모델이라고 했을 때 떠올릴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이상적 이미지는 존재하는데, 통상 레이싱 모델이라 불리는 모델들은 다른 모델보다 그런 이미지에 가까운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레이싱 모델은 다른 모델들처럼 제품을 돋보이게 하는 데 일차적인 임무가 있다. 그러나 역으로 아름다운 모델의 이미지가 사람들의 시선을 강하게 견인하고 제품의 이미지는 따라오는 경우가 있다. 주객 전도라고 하는 이들도 있는데, 오히려 이것이 각인의 효과는 더 크다. 이를테면 최면의 효과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레이싱 모델들은 다른 영역의 모델 대비 개인 인지도가 조금 더 높다. 과거엔 이런 조건을 활용해서 방송가로 진출하려는 경우도 많았는데 큰 성공 사례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요즘의 레이싱 모델들은 본업에 더욱 충실하거나 다른 사업적 아이템을 찾는 등 직업인으로서의 역량도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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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부분이 첫째다. 대부분이 프로페셔널하다. 프로페셔널하다는 것은 함께 일하는 사람의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과거 레이싱 모델 하면 많은 사람들이 했던 이야기가 '편하게 돈 벌고 노는 것 좋아한다'였다. 지금은 아니다. 아니 그 때도 일 자체가 편한 직업은 아니다. 모델이 편한 직업인 적은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건 가장 가까이서 작업하는 나 같은 사람들이 더 잘 안다. 완전한 신체 노동이다. 그래서 레이싱 모델로 활동하거나 자동차 관련 일을 하는 모델들은 식사할 때 예쁜 척 하며 깨작거리는 경우가 드물다. 배가 안 고플 수가 없다. 키가 크고 체지방량은 적어 대사량이 많은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이들 대부분은 개인사업자다. 자신들이 일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기업이 공식적으로 주최하는 행사의 포즈 모델을 하든 아마추어 사진사들을 대상으로 하는 촬영회를 하든 빠릿빠릿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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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나온다. 한 일터에서 다음 일터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차와, 차를 능숙하게 몰 수 있는 운전 실력도 필요하다. 모델들은 한 현장에서만 해도 착장이 바뀌고 헤어나 화장의 분위기도 바뀐다. 의상,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준비해주는 현장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현장이 더 많다. 심지어 옷 갈아입을 곳이 없는 현장도 많다. 자동차는 바리바리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자, 피팅룸, 대기실이다. 상당수 모델들이 SUV를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이건 피팅, 뷰티 전문 모델에게도 해당되지만, 레이싱이나 자동차 업계에 한 발이라도 걸쳐 있는 모델의 경우는 자동차를 다루는 것이 조금 더 능숙한 것은 사실이다. 가까이서 보는 것들이 자동차다 보니 차의 특성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레이싱 모델과 일하는 장점의 2-1쯤 되는 사안이 여기서 나온다. 운전을 잘 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어떤 차량이라도 브랜드명과 차명을 대략은 알고 있다. 엔진 제원까지는 아니어도 세그먼트(차량의 크기 등급)나 스타일(외형) 정도는 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운전하는 모습을 연출할 수 있다. 또한 차를 과감히 다룬다. 과감히 다룰수록 사고 위험이 적다. 우물쭈물하는 운전이 사고를 부르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시승용으로 빌리는 차량은 상당수가 고가다. 현장에서 함께 하는 모델이 믿음직한 운전자로서의 모습도 보여 준다면 구현해낼 수 있는 컨텐츠의 결도 다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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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있는 레이싱 모델 상당수는 30대 초반이다. 경험이 없으면 잘 해낼 수 없는 일이다. 레이싱 경기만이 아니라 모터쇼 포즈 모델 역할도 마찬가지다. 다른 소비재와 달리 자동차는 덩치가 크고 제품과 인물의 관계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다. 경험을 통해서만 최적의 구도가 어떤 것인지 알아낼 수 있다. 이건 포토그래퍼나 영상 디렉터도 모르는 부분일 수 있다. 그런 경험이 있다 보니 호흡 맞추기가 쉽다. 안면이 한두 번 있는 모델이라면 어떤 컨셉트도 빨리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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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좋은 점은 많다. 긴장 속에서 진행했던 촬영 후, 보정을 하다 보면 인물의 아름다움이 자동차와 어떻게 어울리는지를 점점 알게 된다. 역으로 자동차가 사람을 돋보이게 만드는 순간도 있는데, 그것이야말로 제품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 준 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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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싱과 관련됐거나 자동차 관련 일을 많이 해 본 모델과 작업하길 선호하는 이유라면 천 가지도 댈 수 있다. 그 이유들이 다 진짜다. 물론 혹시나 하는 로맨스를 꿈꾸지는 않는다. 내가 가진 건 많지 않아도 양심 하나는 확실하게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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