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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25. 2021

선유도 좀비 13화. 어차피 믿을만한 광경은 없었어

선유도 좀비



13화



이 쯤되면 슬로모션으로 표현될 결정적 장면이 나와야 하는 게 아닐까. 아파트 거실 한가운데에는 괴물의 공격을 받은 주인공, 그 주인공을 지혈하는 또 다른 주인공, 칼을 꽉 쥐고 놓지 않는 또또 다른 주인공, 베란다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낸 금고의 문을 열기 직전의 또또또 다른 주인공이 다 모인 이 상황은 결정적 장면이 나오기 충분하다. 아파트 외부 벽면을 빠르게 오르는 괴물들의 기대에 부흥하려면 말이다.

물론 선유도의 한 아파트 거실에 모인 네 사람은 깨닫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가 좀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얼마 후 그들이 세상을 구하는 많은 영웅이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원인은 있다. 그들의 부모, 그들을 예뻐하던 혹은 관심 없던 친척들, 학교의 선생들 중 단 한 명도 그들이 영웅이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 이래나 저래나 지금이 결정적 순간이다.


한쪽 박경은 핑크 골드빛의 금고를 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렇지만 손이 금고에 닿을 찰나 박경은 주저했다. 금고의 문고리가 없는데 손을 뻗는다고 열릴 리 만무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쾅! 하는 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그 탓에 박경은 몸을 움츠렸고 케이트는 칼을 쥐고 일어섰다. 베란다 창밖에서 안으로 들어 오르는 괴물 하나가 온몸을 다해 창문을 깨려고 시도했다.


"손으로 밀어!!!"


그때 수요일이 안간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그제야 박경은 손바닥으로 금고를 아래로 향해 힘껏 밀었다. 그러자 온 세상이 까맣게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괴물들의 배고픔 섞인 그으렁거림과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때 불꽃 하나가 거실에 나타났다. 페니가 든 라이터였다. 박경은 페니가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깜깜한 어둠 속에서 순식간에 라이터의 불을 켰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질문은 생략했지만 반드시 나중에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한번 더... 눌러요."



힘이 빠져가는 수요일의 목소리. 박경은 손바닥으로 금고를 다시 한번 눌렀다. 그러자 금고는 천천히 위로 올라오며 파란빛을 드러냈다. 투명한 유리로 둘러싸인 상자였다. 위잉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부터 약 50cm 정도 올라와 박경의 눈 앞에서 멈췄다. 유리를 통해 박경은 자신의 번진 마스카라 자국을 마주했고 자동으로 열린 상자 덕에 유리 안에 작은 앰플들이 빽빽이 놓여있는 것을 발견한다. 박경은 본능적으로 앰플을 꺼내 거실로 나왔다.


금고에서 새어 나오는 빛은 꽤 밝았고 덕분에 페니는 라이터의 불을 껐고 다시 자신의 양말 속으로 넣었다. 박경은 그 모습을 포착했지만 질문은 또 생략하기로 한다.


박경은 주사기에 앰플을 꽂았다. 그리고 정신을 잃어가는 수요일에게 놔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주사를 놔본 적이 전무하기에 망설이는 사이, 페니가 주사기를 뺏어 있는 힘껏 수요일이 팔에 꽂았다. 이 장면이 결정적 순간이었을까. 물론,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주사를 놓고 몇 초가 흘렀을까. 그 어떤 반응도 없자 박경은 초조해졌다. 최근 받은 정신과 상담에서 너무 과도하게 초조해하는 것은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이 순간 박경은 묻고 싶다. 이 정도 일이면 과도하기 초조해해도 되는지 말이다.


"... 주사를 더 놓아야 할까요?"


박경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경과 페니, 케이트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수요일의 피로 젖었던 수건에서 핏물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라지는 길을 따라가 보니 수요일의 목 주변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들도 마찬가지였다. 야무지게 자신들의 주인 곁으로 돌아가고 있다. 박경과 케이트도 그 광경이 믿기는 어려웠지만 지금까지 본 것들 중 믿을만한 것은 어차피 많이 없었으므로 크게 상관은 없었다.


정오가 지나고도 40분이 더 지나간 시간, 쏟아낸 피들이 제자리를 찾을수록 수요일의 얼굴은 다시 생기를 찾았고 이제 곧 수요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으리라. 남은 세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와 자신이 알고 있는 괴물에 관해 말하는 것이 그 시작이겠지.



1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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