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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21. 2021

선유도 좀비 11화. 우리가 있던 17층을 향해

선유도 좀비


엘리베이터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케이트는 칼을 꽉 쥔 채 엘리베이터 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 상황을 주시했다. 빠른 속도로 인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떤 층은 하얀 벽을 채운 핏자국이 선명했고 저 피가 혹여 박경의 피가 아닐지 걱정됐다. 하지만 아닐 거라 믿는 수 밖엔 없었고 스스로 믿고 싶은 만큼 케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칼을 더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 수요일은 불안해하는 페니를 다독이려고 했다. 그렇지만 고개 숙인 페니를 보며 그냥 지켜보는 게 낫다고 판단한다. 누군가는 다른 이의 손길로 위로를 얻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아닐 수 있으므로. 검은 후드티 무리와 페니가 어떤 관계인지도 물으려 했지만 참았다. 지금 그게 중요할까. 페니는 지금 혼자 있는 게 나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 누구도 혼자 있어선 안된다. 페니에겐 안된 일이지만 앞으로 긴 시간 혼자 있을 일이 드물어질 것이 분명하다.


"다친 사람 없죠?"


엘리베이터 정적은 무척 긴 것처럼 느껴졌지만 고작 7초 정도가 흘렀을 뿐이다. 그 사이 17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번호판은 10층을 가리키고 있었다. 피가 물든 칼을 든 케이트의 안부에 수요일과 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괴물로 변하고 알 수 없는 무리들이 그들을 돕는 이 상황에서 케이트의 칼솜씨에 대해 물을 필요는 없었다. 만약 무사히 그들이 있던 17층으로 들어간다면 그때 물어도 늦지 않다. 박경이 괴물이 되지 않고 그대로 있어만 준다면.




그때였다.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며 멈춰 서며 조명이 꺼지고 번호판도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아, 더한 게 남았구나. 케이트는 짧은 한숨을 내뱉고 싶었지만 두 사람을 위해 참았고 수요일은 넘어지는 페니를 위해 참고 있던 손을 뻗었다. 곧이어 엘리베이터의 무게가 무색할 만큼 진동이 울리는 것처럼 내부가 흔들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되겠지만 이 흔들림은 아래 줄을 타고 올라오는 괴물들로 인한 것이다. 300년 넘게 살아남은 수요일이라고는 하지만 엘리베이터 아래를 관통해 바라보는 능력은 없었기에 세 사람의 발밑으로 괴물들이 올라오고 있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괴물들이 이토록 빨라진 것에는 분명 원인이 있고 방법 또한 있을 거라 수요일은 할 수 있는 최대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선유도역 그 마트 앞에서 어떤 상황들이 있었는지 수요일은 당시의 상황으로 기억을 옮겼다. 그리고 떠오르는 하나, 괴물이 괴물을 물고 죽이는 모습이었다.


상황은 이러했다. 이미 괴물이 된 괴물들은 자신의 야망만큼 진화할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닌 자신의 동료라고 할 수 있는 같은 괴물을 공격해 죽이면 되는 거였다. 게임 속에서 포인트를 올리는 것처럼 더 많은 동료를 죽이는 괴물에게는 '진화'라는 포인트가 주어졌다. 엘리베이터 줄을 타고 빠르게 오르는 이 괴물들처럼.

이 와중에 다른 괴물을 죽이지 못하는 마음 약한 괴물들은 여전히 선유도역 앞을 헤매거나 아파트 입구에서 다른 괴물들에게 공격당했다. 괴물들의 세상 안에서도 죽고 죽이는 경쟁이 존재하다니, 참 서글프지 않은가.


수요일은 여길 당장 탈출해야 한다고 확신했고 케이트는 이미 엘리베이터 문틈 사이로 칼을 꽂고 있었다. 수요일은 달려가 케이트가 문을 여는 것을 도왔다. 칼을 휘어지며 고통스러워하는 듯했지만 고맙게도 부러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맛깔스러운 김밥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수요일은 몇 주 전 단무지가 빠진 김밥을 판 김밥집주인 아주머니를 속으로 욕한 것을 지금에 와서 후회한다. 상황이 나아지면 그 집 김밥을 다시 먹을 기회가 오길.


"페니 님! 문 좀 벌려줘요! 어서요!"


케이트는 주저하고 있는 페니에게 소리 질렀다. 페니는 마치 이 순간이 꿈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케이트는 내심 걱정했다. 더불어 저 가는 팔뚝으로 엘리베이터 문을 벌릴 수 있을지 또한. 그러나 이 공간에 저 문을 벌릴 팔은 페니의 것뿐이었다. 페니는 이 상황을 분명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거리가 필요했다. 현실과 지금의 자신을 떨어뜨릴 그 거리를 돈으로 살 수 있다면 연말에 받을 성과급 전부를 줄 수 있을 텐데. 거리는 안타깝게도 돈으로 살 수가 없다.





'당신의 팔과 손에 우리의 영혼이 달렸다고 상상해봐요'


문득 페니는 백발 여성을 만났던 그 크루즈에서 처음으로 화투 대결을 하던 날을 떠올렸다. 왜 이 순간 그날의 기억과 그녀의 말이 페니를 사로잡는 것인가. 자신에게 온 화투패를 보던 페니는 그녀의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과도한 시적 언어들이 적응이 되는 듯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질 그 무언가가 막연히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안까지 그 말이 페니를 따라올 줄이야.

페니는 그 말로부터 탈출이라도 하려는 듯 엘리베이터 문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문을 벌렸다. 케이트는 내심 자신이 페니의 가는 팔뚝만 보고 약할 것이라 판단한 자신의 성급함을 후회했다. 결국 가까스로 문은 열리고 밖이 보였다.  

 

페니는 무릎을 꿇고 등을 내줬다. 케이트나 수요일이 자신을 밟고 오르라는 뜻이었다. 수요일은 케이트를 바라봤다. 케이트는 자신이 가장 먼저 오르는 게 낫다는 것을 모두 동의한다고 느꼈다. 사람이 위기의 순간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듯 위기의 순간 이들은 아무 말 없이 통하는 초인적인 소통을 느낀 듯하다. 물론 당장에는 이게 초인적인지 어쩐지 계산할 틈은 없었다.


케이트는 작은 곰들이 손을 흔들고 있는 페니의 맨투맨  부분을 밟고 올라서 위로 손을 뻗었다. 가벼운 몸무게 덕분에 비교적 쉽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빠져나왔다. 수요일은 페니에게 다음으로 오르라며 몸을 일으켜줬다. 페니는  순간 거절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아래로는 수요일, 위로는 케이트의 도움을 받아 엘리베이터를 빠져나왔다. 그다음으로 수요일이 케이트와 페니, 자신의 근력 넘치는 다리의 도움을 받아 흔들리는 엘리베이터의 안녕을 고했다.  사람이 아주 찰나의 안도를 즐기려던 그때, 수요일의 뒤로 나타난 괴물이 수요일의 목덜미를 물었다. 케이트가 재빨리 괴물의 머리를 찍어내렸지만 이미 수요일의 목에는 피가 흘렀다. 수요일은 아픔보다 먼저 자신을  괴물의 모든 기억이 자신에게 주입되었음을 깨달았다.  괴물이 범한 사람이었을 , 사랑하는 연인과 가족이 있었을 , 취업이 되지 않아 제약회사의 임상실험의 테스트에 참여하며 생계를 이어나갈 때의 기억까지. 평범한 임상실험을 시작으로 어둡고  어두운 실험에까지 참여하며  큰돈을 받아 연인과 가족에게  선물을 생각하며 들떠하던 기억까지도 말이다. 수요일은 괴물의 정체와 진화 속도에 대해 자신이 가졌던 의문점이 조금씩 풀려감을 느낀다. 그리고 300  자신을 사랑했던 노비에게 물렸던  고통이 다시 한번 몰려옴을 알아간다. 노비 신분으로 헤어진  다신 만날  없었던 아들에게 수요일은 이런 말을 했었다. 무언가를 알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하지만  고통과 타인의 , 그리고  커다란 진실을 아는 것도 과연 축복이라   있을까. 피가 묻은 페니의 손목시계가 12 33분을 가리킨다.


1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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