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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19. 2021

선유도 좀비 10화. "살아주세요, 온전히"

선유도 좀비


"우리는 시시하게 ‘손모가지’를 걸거나 하진 않아요."


페니는 백발의 여성이 다음에 할 대사가 너무 쉽게 예측되어 놀라울 지경이었다. 인생을 건다고 하겠지, 페니는 생각했다. 그리곤 그 대답에 어떤 놀라운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했다. 크루즈 여행까지 와서 누군가의 맞장구를 쳐주는 자신의 상황이 과연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남의 말을 잘 들어줄 것만 같은 페니의 외모 때문인지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페니 앞에서 넋두리를 자주 했기 때문에 페니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그러나 익숙한 것과 좋아하는 것은 분명 달랐다. 친한 사람은 물론 모르는 사람까지 찾아와 자신에게 넋두리를 하고 하소연에 답해주는 것을 페니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그 또한 일종의 스킨십이기 때문이다. 페니는 스킨십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교사 임용고시 치르고 많은 대학 동기들이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런 동기들 속에서 페니가 크루즈에 몸을 실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스킨십.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의 스킨십을 잠시만 쉬자. 그 바람 하나였다. 그래서 페니는 또래 친구들이 절대 가지 않는 크루즈 여행 중에서도 가장 인기 없는 크루즈 패키지를 골랐다. 누구도 가지 않을 곳만 골라서 항해하는 크루즈 여행. 페니를 위한 여행이었다. 그리고 그 크루즈 위에서 페니는 아름다운 그림의 화투 컬렉션을 가진 백발의 여성을 만났다. 주름졌지만 하얀 피부의 화장끼 없는 얼굴, 다듬지 않고 허리까지 오는 흰 생머리, 국적을 알 수 없는 분위기는 묘했지만 눈에서는 빛이 났다.


"손모가지 대신, 충성을 바치죠."


백발 여성이 말을 이었다. 그녀와 페니의 대화는 화투에서 졌을 경우 '손모가지' 대신 무엇을 내놓느냐에 대한 것이었다. 페니는 예상치 못한 백발 여성의 말로 인해 크루즈 여행이 조금 더 재밌어질 것 같다고 직감했다. 그리고 조금 더 안전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데 왜 '우리'라고 하시죠?"


페니가 물었다. 백발 여성은 크루즈 여행 내내 혼자였는데 주어를 늘 '우리'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했다. 백발 여성을 만난 지 이틀이나 지난 시점에 페니는 문득 궁금해졌고 깊게 파고들고 싶어 졌다. 그리고 바로 동시에 후회했다. 이렇게 파고들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스킨십과 비슷하니까.


"화투 좀 치나요?"


백발 여성은 '우리'에 대해 묻는 질문에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했다. 아니 이건 질문이 아닐지 모른다. 도전 혹은 호기심. 이건 질문을 받은 이의 화투 실력에 따라 질문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페니에게 이건 도전이었다. 페니는 늘 차가운 자신의 손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백발 여성이 지니고 있던 화투 컬렉션을 처음 본 순간 느낀 심장의 떨림이 손끝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대답 대신 백발 여성 앞에 놓인 화투를 집었다. 그건 마치 춤과 같았다. 순간 페니의 손은 선이 되었고 움직임은 리듬이 되었다. 화투를 칠 때면 페니는 스스로 자신이 댄서가 된다고 여겼다. 민첩함과 계산, 리듬을 타는 것까지 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춤의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대학을 다니는 4년 내내 탈춤 동아리를 책임지며 조강지처에게 남편을 뺏는 요부 역만을 맡았던 페니는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모든 장르의 춤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앞서 말한 세 가지다. 민첩함과 계산, 리듬. 화투에서도 분명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기다려요. 우리 모두를 이기고 우리의 충성을 가져갈 그 누군가를."



페니는 그 누군가가 자신이 될 것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백발의 여성은 페니가 크루즈를 타기 전부터 아니 임용고시를 치르기 전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 아이였던 페니가 공원에 앉아 재미로 화투를 치던 어른들 무리를 빛나는 눈으로 바라볼 때부터 알고 있었다. 페니에게 자신과 자신을 포함한 '우리'의 모든 충성을 바칠 것임을.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선유도역 앞에서 괴물들에게 둘러싼 페니를 목숨 바쳐 지키게 될 것임을 말이다.



평화로웠던 어느 일요일 12시 25분이 지나는 시각, 선유도역 앞에서 페니와 케이트 그리고 수요일을 들어 올려 괴물로부터 지키는 검은 후드티 무리. 그중 페니의 손을 꼭 잡은 한 사람은 그녀였다. 윤기가 흐르는 백발은 후드티의 모자로 인해 가려졌지만 페니는 그녀임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크루즈 여행이 끝날 때쯤 그녀는 페니가 국제 화투 지하조직의 수장이 되는 것은 운명이라 말했었다. '우리'의 충성을 받을 누군가는 페니라고 확신했었다. 페니는 생각한다. 자신이 '우리'라는 무리의 그 확신을 과소평가했구나.




결국 후드티 무리는 페니와 케이트, 수요일을 그들이 있던 아파트 입구까지 안전하게 이동시켰다. 세 사람의 몸에는 피 한 방울 튀지 않았지만 얼핏 봐도 후드티 무리의 타격은 컸다. 후드티 무리의 뒤로 피가 2차선 바닥을 가득 메웠고 괴물의 공격으로 인해 변해가는 몇몇 후드티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애쓰고 있었다.



"살아주세요. 온전히"



후드티 무리는 가까스로 세 사람을 아파트 입구로 밀어 넣었다. 백발의 여성은 빛나는 눈을 잃지 않은 채 페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파트 입구에 놓인 유리문이 가로막고 있었다. 페니는 유리문에 손을 댔고 그 맞은편으로 백발 여성의 손이 놓였다. 주름졌지만 화투를 칠 때면 춤추듯 우아하던 그녀의 손을 페니는 잊지 않겠다 다짐했다. 그 사이 수요일은 다행히 아직 운행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띵동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수요일과 케이트는 유리문 앞에서 떠나지 않으려는 페니의 어깨를 감쌌다. 올라가야만 했으니까. 그곳도 안전하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이곳보다 더 나은 것은 분명했다.



12시 29분, 페니가 힘겹게 유리문에서 떨어져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순간. 속절없이 빠르게 진화한 괴물 하나가 아파트 외부 벽을 따라 위로 또 위로 오르고 있었다. 1층을 지나 3층, 7층, 10층 그리고 17층.. 사람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1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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