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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피컬 박 Mar 18. 2021

선유도 좀비 8화. 다시 만난 세계

선유도 좀비


수요일이 도망치며 내달리던 그 빨래터는 사라졌다. 그 위에는 시멘트와 흙이 채워지고 사람들은 건물을 세웠다. 많이 더 많이 그리고 높이 더 높이. 가끔씩 마음의 위안을 주던 수평선은 건물들에 가려져 간신히 모습을 드러냈다. 선유도역이 보이는 마트 앞에서 페니를 껴안고 있는 수요일은 300년 전 그날을 떠올린다.

죽을힘을 다해 달려 자신이 일하던 대감댁에 도착한 수요일은 텅 빈 집을 보게 된다. 같이 물을 마셔야 할 노비를 찾기 위해 수요일은 대감댁 곳곳을 뒤졌다. 곡식이 가득 차 있던 곳간, 패물이 가득했던 대감 부인의 방, 과일이 늘 놓여 있던 사랑방에도 개미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놔주세요!"


잠시 회상에 잠겼던 수요일이 현실로 돌아왔다. 페니가 수요일의 손에서 떠나 후드티 무리에게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시간은 12시 18분. 페니의 그런 행동에 딱히 대책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후드티 무리가 괴물들과 싸우는 모습을 보기만 하는 것은 페니가 바라는 대책은 아니었다.


수요일은 재빨리 페니를 잡으려고 했지만 놓치고 말았고 더 나쁜 상황은 케이트의 칼도 페니를 덮치려는 괴물을 놓치고 만 것이다. 온전한 사람이었다면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려던 남성이었을 괴물은 페니를 빠르게 쫓았다. 그 모습을 보며 수요일은 문득 궁금해졌다. 300여 년 전 괴물들은 갓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느릿느릿했는데 현재 이 괴물들은 어떻게 체력 좋은 10대처럼 날뛰는 것인가. 300여 년 동안 괴물들의 유전자도 진화한 것일까. 진화한 것이 맞다면 이들은 지구 어디에선가 존재하고 있었어야 한다. 그러나 수요일은 이들의 정체를 감지한 적이 없다. 최근 한 달 전까지 말이다. 만약 누군가 이들의 정체를 의도적으로 숨기고 파악하지 못하도록 차단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말이 된다. 그런데 누가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악!!!"



수요일의 머릿속은 다시 대감댁 부엌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집안을 뒤져도 자긴 혼자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수요일은 부엌으로 향했다. 그리고 찬장에 숨겨둔 양동이를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양동이를 한 모금 또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뒷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다 마시지 못하고 뒤를 돌아본 순간 부엌 건너편 방에서 나오는 노비를 보게 된다. 자신을 연모하던 그 노비. 너무 어리다 여겼기에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아주지 않았던 수요일. 그런 수요일을 보면 멀리서도 큼지막한 걸음으로 내달려오던 그 노비.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느릿느릿 걸음마를 떼는 아이 같았고 마치 잃어버린 엄마를 찾는 미아 같기도 했다. 눈은 그 노비가 맞았다. 머리가 깨져 머리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이다는 것 말고는 그 노비가 맞았다. 수요일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을 후회했다.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이 노비는 나를 해칠 리 없다고 믿고 싶어 졌다. 소문에는 사람을 반죽음 상태로 만든다고는 했지만 사람의 천성이라는 것이 어디 가나.. 수요일은 믿었다. 그래서 수요일은 노비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다. 노비는 천천히 수요일의 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수요일의 손을 잡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었다. 부엌에서의 기억은 그것으로 끝이다.



"페니 님!! 피해요!"



케이트는 페니를 향해 소리 질렀다. 페니에게 달려가려는 찰나 케이트를 막아선 괴물들 때문에 진입로가 막혔기 때문이다. 지난주 케이트가 백화점에서 사려고 한 노란색 시폰 블라우스를 입은 괴물(이 괴물은 몇 프로 세일해서 산 걸까) 같은 팀 부장님이 자랑하던 비싼 시계를 찬 괴물(동일인물이라면 조금 더 아프게 죽여줄까), 여자 친구와 손을 잡은 상태로 괴물이 돼버렸는지 잘린 손을 다정하게 잡은 괴물까지(스위트하니까 절명을 시켜줄까).. 다들 각자 사연이 있는 이들이지만 지금은 케이트의 칼에 생을 완전히 마감할 사연만 남았다. 케이트는 셋을 단숨에 제압했다. 부장님 같은 이는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고통스럽게 제거했다.




그리고 페니를 향해 달렸다. 벌써 당했으면 어쩌지. 케이트는 두려워졌다. 잃고 싶지 않았다. 페니와 수요일, 아파트 거실에서 자고 있을 박경과 언제가 꼭 하와이 여행을 가자고 했었는데. 이렇게 잃을 수는 없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내가 눈물을 보이다니. 킬러 교육을 함께 받던 P가 보면 정색을 하거나 총을 잡고 웃을 것이다. 만약 그가 온전히 살아있다면 말이다.

케이트는 페니가 있을 자리에 왔지만 보이지 않았다. 수요일도 마찬가지로 모습을 감췄다. 케이트는 이렇게 짧은 순간에도 이토록 큰 상실감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손에 힘이 빠져 칼을 놓으려는 순간 케이트는 누군가 자신을 제압해 들어 올리는 느낌을 받는다. 순간 다시 칼을 꽉 쥐었다. 시간은 12시 22분, 죽기에 좋은 시간은 아니다.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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